제9화, 해외에서 듣는 한국의 부고 소식
한국에서 온 전화 한 통,
"네, 어머님~"
"어.. 할머님 돌아가셨어. 장례 잘 치를 테니 걱정하지 말고 지내고 있어."
"............."
"여보세요?"
"............ 흐흑..."
수화기만 든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던 그날.
그날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아이들이 달려와 "할머니 전화야?" 라며 묻는 말에 '응.'이라는 짧은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계단 앞에서 서서 눈물만 뚝뚝 흘렸다.
한국에서 전해진 할머님의 부고 소식
할머님은 남편 인생에서 추억이었고, 사랑이었다.
그가 어렸을 적부터 말 안 듣는 사춘기 시절, 군 시절, 나와 결혼하는 그날까지 모든 날을 곁에서 함께 지켜봐 주셨다. 첫째가 태어나 배넷 머리를 자를 때에도, 둘째가 태어나 뒤집기를 할 때도 할머님과 함께 추억으로 기억했다. 산책을 하고 집으로 들어오시면서 우리 집에 예쁜 아기가 있다며 늘 좋아해 주셨다.
나는 알지 못하는 할머니의 존재와 사랑이었다. 아무런 조건 없는 사랑과 배려, 눈빛과 말투에서, 또 손 끝에서 나오는 그런 사랑을 처음 느껴봤다.
나 조차도 버거운 마음을 남편에게 전할 용기가 필요했다. 얼마나 온전히 슬픔을 감당할지, 그럼에도 말없이 꾹 참을 것을 알기에 가슴이 한없이 무거웠다.
"있잖아…할머.. 님께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울고 있는 나에게서 그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응. 알겠어..."
가끔씩 한국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고 헤어질 때, 가족들과 이별하는 그 시간이 나는 여전히, 아직도 어렵다.
언제부터였을까, 우리는 다시 뉴질랜드로 떠나는 날마다 차오르는 슬픔을 억지로 눌러가며 할머님께 큰 절을 올리고 나왔다. 아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피하고 싶던 전화를 받은 그 순간 우리는, 예상했던 것처럼 너무 먼 거리에 떨어져 있었고, 딱히 할 수 없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공허하고, 허무했으며, 잔인하기까지 했다. 침묵과 눈물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해외에 살고 있는 성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일, 여러 번 겪어내도 정말 자신 없는 일.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잦아질 현실 앞에, 침묵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 이민자들만 아는 공감의 감정. 서로가 어떤 마음인 줄 알기에 그 시간을 함께 보내주기도 한다.
외국 스타일이라는 것이 가장 가치 없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가족과 함께 웃으며 살 수 없다는 것, 슬픔과 아픔을 그 순간에 같이 나눌 수 없다는 것. 그런 순간을 마주 했을 때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삶의 선택이 때론 축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아픈 결핍을 안겨주는 일이기도 하다.
이게 과연 가치 있는 일일까,
'더 늦었다는 생각이 들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갈까,,,,? 한국으로 돌아가 가족들 옆에서 살면 가치 있는 삶이라고 느껴질까?' 정답을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 부부는 약속이나 한 듯 며칠 동안 웃을 일도 없이 가만히,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며칠이 지나자 어둡고 흐렸던 하늘이 밝아지며 햇살이 반짝인다. 파랗고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한다.
'저희 여기서 잘 살아볼게요, 그러니 꼭 지켜봐 주세요. 그리고 언젠가 만나는 그날이 되면 웃으며 다시 만나요..'
가족의 이별 앞에서 어떻게 현명해질 수 있겠냐마는 그래도 안정과 위로의 경계를 조금 더 넓혀보고 싶다. 그 자리는 남겨진 이들의 가장 큰 위로이자 살아내는 방식이다.
해외생활 Tip, 다른 사람들은 말합니다. "명절에 시댁 안 가서 좋겠다.", "해외 살아서 제사 안 지내서 좋겠다, " 하지만 그들은 해외 생활의 이별을 알지 못합니다. 몇 주 전이 할머님 기일이라 적어봤습니다.
이번 9화, 해외생활 TIP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