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우울증과 향수병이 합쳐지면,
뉴질랜드로 이사 온 후로 딱 3개월은 좋았다!
막내딸이 아이 둘 둘러메고, 낯선 곳에 간다니 걱정됐던 엄마가 같이 와주셨고, 출산하고 오느라 몇 개월 보지 못했던 남편과도 재회했으니 걱정이 없었다!
그런데 3개월이라는 관광비자 기간이 끝이 났고, 친정엄마와 눈물로 이별을 했다. 그리고 출근을 앞둔 남편에게 운전, 마트 계산, 주차비 결재 등 스파르타식 적응훈련을 받았다. 그야말로 독박육아가 시작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낯선 곳에 남겨진 서른넷의 나, 3살 된 큰 딸, 6개월 된 아기
처음에는 남편의 도움이 많이 필요했다. 남편이 퇴근하면 마트를 같이 갔고, 집에 Property Manager(부동산 관리자)나 수리 업체에서 사람이 오면 웃으면서 '우리 남편에게 전화할래?'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남발했다. (아직도 남편은 내가 이렇게 말한 줄 모르고 있다. 이 글도 안 읽을듯하지만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사과 말씀 드립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셋은, 제일 만만한 집 앞 공원을 제일 많이 갔다. 한국에서 보기 힘든 규모의 큰 공원이었는데, 잔디 말고는 특별할 게 없었다. 우리는 그곳에 매일 나가 걸음마 연습도하고, 공놀이도 했다. 어느덧 그 공원이 지겹고 따분해지더라. 그래서 옆 동네 공원을 알아냈고, 그렇게 한 걸음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큰 아이의 유치원이 언제나 그렇듯 방학을 했고, 우리는 집에서, 마당에서, 공원에서 놀았는데,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움츠리고 있으면
우리 아이들은 세상 구경도 못하고
집에만 있겠구나.
그래, 뭐 죽기야 하겠어?
내일은 멀리 나가보자!
그렇게 기저귀, 젖병, 물통 등 한 짐을 쌓고, 유모차 싣고, 애들 태우고 호기롭게 출발.
하지만 차선은 반대요, 큰 아이는 신이 났고, 작은 아이는 울고, 길은 모르니 내비게이션은 봐야 하고, 처음으로 오클랜드 브리지를 건너는데! 정말 식은땀이 나서 등이 젖을 정도로 긴장을 했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오클랜드 박물관이었고, 아무것도 알리 없는 아이들은 뛰어다니다가 끝이 났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다녀온 외출 이 후로 한 동안 집에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족들 식사(이유식 포함), 아이들 등하원, 목욕, 병원, 유치원 행사 등 이 모든 걸 내가 책임지고 해야 한다는 생각이 참 무거웠던 것 같다. 물론 남편이 있었지만 퇴근 전까지는 어린 두 명의 아이를 내가 혼자 돌봐야 했기 때문에 버거웠던 것 같다. 그것도 말도 안 통하고,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이곳에서 말이다.
뉴질랜드에 도착한 지 6개월밖에 안 됐는데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들기 시작했다. 둘째는 씩씩하게 잘 크고 있었지만 나의 면역력은 점점 떨어져만 갔다. 감기와 방광염에 자주 걸렸고, 이 나라 약을 먹으면 속이 울렁거리고 두통이 생기는 부작용도 있었다. 어느 주말에는 이유 없이 화가 나고, 눈물이 나는데 아이들 앞에서 울 수가 없어 차를 타고 나와 엉엉 울다 들어가는 날도 생겼다. 한국에 가볼까 생각도 했지만 6개월밖에 안 됐는데 너무 힘들다며 애 둘 데리고 뛰어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까짓 육아 우울증과 향수병, 내가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도 있었다
한 번은 귀에서 소리가 나고, 통증도 있어서 병원에 갔다. GP(General Practitioner, 일반의)를 만났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우리는 영주권자가 아니라서 1회 진료에 NZ$80(한화 약 6만 원)를 냈어야 했다. 며칠뒤에는 심장 두근거림이 심해져 병원에 갔다. 이상이 없다고 했다. 며칠 뒤에는 두통이 심해져 병원에 갔다.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GP가 물었다.
한국에서 언제 오셨어요? 이곳에 다른 가족이나 친구가 있으신가요?
그 대답이 입보다 눈에서 먼저 나왔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참고 있던 눈물이 밖으로 터졌다. 그렇게 진료실에서 한참을 울었다. GP 선생님께 미안했고, 민망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갑자기 울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나왔다. 그리고 내가 왜 계속 아팠는지 알았다. 그리고 이까짓 우울증과 향수병 왜 못 이겨내나 답답했다.
큰 아이 유치원 보내고, 유모차 밀며 운동을 시작했고, 유아 프로그램도 찾아다녔다. 물론 친구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주말에는 가족이 동물원에 가서 놀다 왔다.
동물원 다녀온 다음날 왼쪽 등이 아팠다. 남편이 출근한 후 큰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들어왔는데 몸이 으슬으슬 춥더니 열이 나기 시작했다. 약을 먹었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남편이 일찍 들어와 아이들을 돌봤고, 나는 약을 먹은 후 1~2시간만 열이 잠깐 내렸다가 또 올랐다. 밤새 아프고 병원에 갔다.
뉴질랜드는 병원 내부에는 채혈실이 따로 없다. Lab test라는 건물이 곳곳에 따로 있어 의사가 써준 페이퍼를 가지고 가서 피를 뽑는 시스템이다. 또다시 차를 타고 갔는데, 간호사가 혈관을 못 찾아 내 팔을 계속 찔러댔다. 너무 힘들고, 아팠다. 결국 손가락에서 피를 짜내 검사를 마쳤고, 신우신염이라는 검사 결과를 받았다.
가방을 쌌다. 신뢰 있는 의료진(개인적인 의견)을 만나러 한국에 갔다. 어쩌면 나는 이를 핑계 삼아 11개월 만에 한국에 가게 되어 기뻤는지도 모른다. 한국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통증이 심했을 텐데 왜 다 앓고 이제 왔어요?
선생님께 오고 싶었다고, 나 너무 힘들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한국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고, 엄마 밥 먹고, 어머님 밥 먹고, 친구들 만나니 병이 깨끗하게 다 나았다.
그렇게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나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그 후로 친정 식구들이 한번 놀러 와줬고, 시부모님도 와주셨다. 덕분에 나는 코로나로 3년 동안 한국을 못 나갔지만 잘 이겨냈다. 육아 우울증과 향수병은 못 이기겠더라. 그냥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하고 싶은 일 하는 것이 제일 현명한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