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이민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전 세계 194개국에 한국인이 흩어져 살고 있다. 2017년 한국 외교부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약 740만 명의 한국인이 다른 나라에 가서 살고 있다. 한국인이 거주 현황을 보면 가장 많이 사는 나라가 중국(2,548,030명), 미국(2,492,252명), 일본(818,626명), 캐나다(240,942명) 등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서', '더 좋은 삶을 위해', '직장에서 해고되어' 등 다양한 이유로 이민을 가고자 한다. 이민은 각자의 선택이다. 우리 가족 역시 자녀 교육을 위해 뉴욕에 왔다. 하지만 뉴욕에서 살면서 가난한 이민자들을 보면서 이민에 대한 환상이 무너졌다. 그동안 보고 듣고 읽고 느낀 점에 대해 정리하고자 한다.
미국은 '이민의 나라'다. 그럼 미국 이민법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했을까. 미국은 이민을 많이 받는 추세였지만 차별도 심했다. 캘리포니아에 노다지를 캐려는 중국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럼 모두 노다지를 캤을까. 노다지 캐러 온 초기 중국 이민자들이 철도회사에서 힘든 노동을 했다. 초기 중국 이민자들이 샌프란시스코에 들어올 때 입국 심사를 받기 위해 수용소를 거치는데 입국 심사받기 전 영양실조와 병으로 죽어가고, 인간이 견디기 힘든 열악한 수용소에서 미래를 위한 꿈을 벽에 시로 적고, 입국 심사를 마치고 미대륙 철도공사에 동원되어 노예처럼 일하며 피눈물 나는 돈을 벌어 샌프란시스코에 땅을 사기 시작해 정착했다. 이민의 역사는 슬프다. 맨해튼 차이나타운에 있는 Museum of Chinese in America에 가면 서글픈 중국 이민자들의 역사가 잘 정리되어 있다.
중국인 이민자들 숫자가 많아지자 미국 정부는 이민 규제를 했다. 1982년 중국인 노동자들을 더 이상 받지 않겠다는 Chinese Exclusion Act(1882)을 발표했다. 그래서 미국에 오고 싶은 중국인들이 많았지만 모두 이민을 올 수 없었다. 그래서 가족이 떨어져 사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유학생 등 소수 예외 카테고리도 있었다.
갈수록 아시아 이민에 대한 규제가 심해졌다. 1924년 미 의회에서 아시아인들의 미국 이민을 허락하지 않은 이민법(Immigration Act)이 통과되고 아시아인들의 합법적인 이주는 불가능했다.
한국의 경우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을 최초 집단 이민으로 본다. 제2차 집단 이주는 1950년 한국 전쟁 후로 본다고 한다. 한국에 파견된 미국 병사와 결혼한 약 5만 명의 한국 여성들. 아시아 이민을 제한한 이민법(1924-1965) 기준으로 보자면 한국 전쟁으로 미국 군인과 결혼해 미국에 온 5만 명은 굉장한 숫자였다. 제3차 이민 집단은 1965년 새로운 이민법 규정이 발표된 후다. 아시아 각 나라별로 2만 명 한도(National Origins Quota)에서 미국 이민을 허용했다.
한인 미국 이민 역사도 깊다. 최초 한인 이민을 하와이 사탕수수(1913년)로 본 견해도 있고, 서재필 박사로 본 견해도 있다. 서재필 박사가 갑신정변 실패 후 1884년 일본 망명 중 1885년 미국에 건너와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을 하며 지냈다. 언어 소통이 불가능하고 취업 허가도 없어 임금도 받지 못하고 사업장에서 쫓겨나는 수난을 당했는데 운이 좋아 후원인 도움을 받아 공부할 기회를 얻어 콜럼비아 대학 재학 중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1890). 당시 황인종에게 시민 자격을 부여하지 않은 미국 제도에 비하면 특별한 일이라고 한다. 서재필 박사는 1893년 콜럼비아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내 한인 최초 세균학 전공으로 의학박사가 되었다.
위 예를 보면 이민법이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 또한 서재필 박사처럼 이민을 오면 언어 장애와 신분 문제로 힘들다. 두 가지 문제는 이민자가 경험하는 현실이다. 소수 예외도 있다. 미리 영주권 받고 영어가 자유로운 케이스.
서재필 박사든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를 한인 최초 이민으로 보든 한인 이민 역사가 100년이 지났다. 세월이 깊다 보니 이민 1세, 이민 1.5세, 이민 2세, 이민 3세 등으로 나뉜다. 그럼 이민 1세와 2세는 같을까. 이민 2세는 언어와 신분 장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된다. 당연 이민 2세는 이민 1세보다 훨씬 더 좋은 상황으로 변한다.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이민 1세에 비추어 영주권 없는 이민자들이 겪는 현실이 지옥처럼 무겁다는 미국 정세다. 해외에 파견되어 임시로 거주하는 경우는 제외(이 경우는 신분 문제 해결되고 안정적인 급여 받음)하고 무작정 뉴욕에 와서 이민 1세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말하고자 한다.
지금 세계의 큰 이슈 가운데 하나가 빈부 차이다. 잘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이 없는 사람이 없겠지만 빈부차는 하늘과 땅 보다 더 큰 미국의 현실이다. 이 숫자를 보고 놀라지 말라. 충격적이다. 2015년 미국 (Source: Inequality.org)에서 발표한 통계다.
Top 0.1% $ 6, 747,439
Top 1% $1,363,977
Top 5% $477,293
Top 10% $ 312, 536
Bottom 90% $34,074
미국에 대한 환상을 갖는 분이라면 충격을 받을지 몰라. 미국에 가면 모두 잘 산다는 것은 환상이다. 한국보다 미국 빈부차가 훨씬 더 심하다. 빈부차는 지구촌 현상이다. 하지만 미국에 사는 부자들이 아주 많다. 전에도 <미국 소득 불평등 역대 최고>에서 언급했지만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에 속하고, 빈부 격차가 가장 높은 국가에 속한다. 통계 별로 약간씩 다르나 미국 상위 1%가 미국 전체 가구수 소득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 신문에도 미국 빈부차가 100년 만에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발표했다. 미국 빈부 격차는 지금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뉴욕에 오기 전 몰랐다.
마크 트웨인이 1873년 발표한 ‘도금 시대(The Gilded Age-A Tale of Today)’에서 유래한 '도금 시대' 빈부 격차도 어마어마했다. 앤드류 카네기, 존 록펠러, 헨리 프릭 등이 도금 시대 사업가들이다.
도금 시대(1870년대-1900)는 미국과 유럽에서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변한 산업 혁명의 절정이었다. 뉴욕, 보스턴, 필라델피아, 세인트루이스, 시카고 같은 대도시에 수 백만의 이민자들이 몰려와 일자리를 찾아 미국의 도시화를 촉진했다. 1900년까지 약 40% 미국인이 대도시에 살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도시는 급속한 인구 증가에 대비하지 못했다. 주택 시설도 부족하고, 난방, 조명, 위생과 의료 시설 등이 부족하니 수백만 명이 질병으로 사망했다.
도금 시대 산업가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잘 살았지만 반대로 이민자들은 빈곤 수준 이하 환경에서 살았다. 빈부 격차가 아주 심했다(history.com).
1890년 기자이자 사진작가 제이콥 리이스 (Jacob Riis)는 자신의 저서 <How the Other Half Lives>을 집필해 뉴욕 가난한 이민자들의 생활을 사진에 담아 정치가들에게 보여주며 이민자들의 삶을 개선하라고 말했다(수년 전 뉴욕 시립 미술관 전시에서 봄).
1893년에 지나치게 확장된 Philadelphia and Reading Railroad and the National Cordage Company 모두 실패했고 이는 미국에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경제적 불황을 낳으며 도금 시대는 막을 내렸다.
주식 시장이 폭락하면서 수백만 명의 실직자, 노숙자와 배고픈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일부 주에서 실업률이 거의 50%까지 상승했다. 1893년 공황은 4년이나 지속되었고 정치적 부패와 사회적 불평등에 시달려 그들의 좌절감이 진보적 의식을 갖게 되고 1901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Theodore Roosevelt)이 취임했다.
Peter Turchin(Professor of Ecology and Evolution at the University of Connecticut and Vice-President of the Evolution Institute) 교수가 발표한 "Return of the oppressed" 보고서에 의하면 1800-1920년 사이 미국 불평등은 100배 이상 증가했다. 지금 미국 빈부차가 극심하고 이런 현상은 미국에서 주기적으로 일어나니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다시 대공황 같은 위기가 찾아올지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작년 유니언 스퀘어 반스 앤 노블 북 카페에 가서 2008년 위기 후 미국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한 현상이 되었다는 내용을 읽었다. 뉴욕에 올 적 아무것도 모르고 왔고 미국 빈부차가 이리 클 거라 미처 짐작도 못했다. 두 자녀가 뉴욕 롱아일랜드 딕스 힐과 제리코 학군에서 공부하니 미국 부자들의 삶에 대해 알게 되었다.
미국 상류층은 한국과 수준이 너무 다르다. 일반 고등학교 학생들도 고급 승용차를 몰고 학교에 가고, 성 같은 집에서 사는 학생들도 있다. 뉴욕 역시 부유층은 시간당 100불 이상하는 과외를 받고 학교 수업 준비를 한다. 미국 고등학교 과정도 쉽지 않다. 분량도 많고 어렵고 좋은 시험 점수는 대학 진학에 필수니 튜터랑 공부하면서 대학 레벨 AP 시험 준비도 한다. 한국처럼 거의 모든 학생들이 밤늦게까지 학원에 가서 공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뉴욕 역시 부모들의 자녀 교육 관심이 아주 높고 상류층이든 중산층이든 자녀 교육에 열심이다.
지난여름 맨해튼 South Street Seaport Museum에 가서 미국 이민에 대한 전시회 보고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하면서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1900-1914년 사이 1300만 명의 가난한 이민 자과 수 십만 명의 부유한 이민자들이 뉴욕에 왔다. 그때도 가난한 이민자들은 '미국이 기회의 땅'이란 경제적 부에 대한 환상을 갖고 미국에 왔다.
1등석 탑승한 부유층들은 매년 유럽에 여행을 가서 약 $11.7 billion(2017 기준 화폐 가치)을 지출했다. 당시 가난한 이민자들은 3등석 티켓(1200불/ 2017 기준)을 구입했고 부유층은 1등석 티켓 구입(4200불-10만 불/ 2017 기준). 1등석 티켓은 가격에 따라 시설이 달랐다고 한다. 3등석에 탑승한 사람들 식사는 죽 같은 음식이었으니 뉴욕에 도착하면 이민국 검사를 받아야 하니 영양가 좋은 음식이었다고 하나 승객들은 불평이 아주 많았다. 1등석 탑승객들은 특별한 음식을 먹었다(Foie gras 등). Hamburg- American Line 승선 레스토랑은 Ritz -Carton에서 운영했고 한 끼 식사가 3등석 티켓보다 더 비쌌다. 100년 전에도 부유한 층과 가난한 이민자들 삶이 얼마나 달랐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럼 뉴욕의 현실을 보자. 2003년 뉴욕시에 140만 명의 이민자가 있었고 이들은 뉴욕시 거주 인력의 47%를 차지했다. 뉴욕주 최저 임금에 직접적으로 영향받는 사람들(시간당 5.15불에서 7.10불로 인상)은 62%가 이민자다(뉴욕시 자료: Immigrant Workers and the Minimum Wage in New York City/ the Fiscal Policy Institutefor the New York Immigration Coalition).
이민을 오면 언어와 신분 장애로 어려움이 많아 닥치는 대로 일을 한다. 서재필 박사도 두 가지 문제로 고충을 받았다고 위에 적었다. 그래서 이민 1세들은 서비스직에 많이 종사한다. 반면 특별한 능력을 보유한 분은 전문직에 종사하기도 한다. 좀 더 구체적인 자료는 아래 (뉴욕 주 감사관실 자료 2010_ 뉴욕시 경제적 측면에서 본 이민자의 역할)에 있다.
이민자들이 종사하는 직업 카테고리:
택시운전사 및 기사 87%
메이드 및 가정부 83%
요식업 근로자 79%
요리사 개인 및 가정간호도우미 요리사 및 주방장 75%
건설 현장 근로자 73%
간호, 정신 의학, 가정 간호 도우미 보육 관련 근로자 72%
웨이터 및 웨이트리스 64%
관리인 및 건물 청소인 64%
운전사 판매원 및 트럭 운전자 64%
공인 간호사 55%
캐시어 55%
소매점 근로자의 감독자/관리자 47%
내과의사 및 외과의사/46%
재무 관리자 32%
비서 및 행정보조원 26%
초등 및 중학교 교사 21%
이민자들의 도시 뉴욕시에 저임금 이민자들이 너무 많고 시간당 10불 이하를 받고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분들도 아주 많다. 수입이 높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이민자들도 상당수 있다. 위 통계는 이민 1세만 포함된 것이 아니다. 이민자 전체를 말하니 이민 1세 직업군이라고 혼동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