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_줄리아드 더블베이스

by 김지수

10월 30일 수요일


가끔은 행운이 찾아오기도 한다. 귀족도 아닌데 귀족처럼 메트에서 오페라를 감상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가을비 오는 날 나도 모르게 가짜 귀족이 되어버렸어.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귀족들 가까이 오페라를 감상하니 좀 어색도 하고 미안한 마음도 들기도 했다.


뉴욕은 마법의 성이다. 한동안 오페라를 감상하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가고 말았는데 글룩의 오페라가 너무 좋아서 다음날 메트 오페라 러시 티켓에 도전을 했는데 무대가 아주 가까운 오케스트라 좌석을 받았으니 행운의 여신이 날 보고 미소를 지었어. 뜻하지 않게 악마가 찾아와 날 괴롭히는 순간도 참 많지만 가끔은 행운의 여신이 찾아온다. 참 이상하다. 전에도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 러시 티켓이 무대 가까운 곳이었는데.


순간을 즐겨라! 오페라를 볼 수 있을 때 오페라를 봐야지. 그렇지 않아. 만약 뉴욕을 떠나면 오페라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을지 모른다. 언제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 생은 정말 아무도 몰라. 대학시절 세계 여행하고 싶다고 하니 모두들 불가능한 꿈이라고 했는데 어느 날 비행기를 타고 런던, 파리, 베를린, 프라하, 베니스, 밀라노 등으로 여행을 갔지. 내 꿈은 샤갈의 그림처럼 하늘을 날아다녔어. 런던과 시드니와 빈에 여행 갔을 때 오페라를 보고 싶다고 하니 오페라 티켓이 너무너무 비싸서 귀족들만 관람할 수 있다고 가이드가 말했지. 미리 예매한 오페라 팬들이 많아서 오페라 관람이 무척 어렵다고 했는데 그 말을 믿었으면 영원히 난 오페라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지 못할 뻔했다. 뉴욕에 와서 자주 맨해튼 음대와 줄리아드 학교에서 학생들이 부르는 아리아를 듣다 보니 오페라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어. 링컨 센터 공연 예술 도서관에서도 가끔 오페라 공연을 봤다. 전부 무료라 더 좋았어. 그 후 메트에서 러시 티켓 파는 것도 알아가게 되고 천천히 뉴욕 문화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지.


뜻대로 되지 않은 인생. 생의 무게가 우주만큼 무겁지만 고민만 하면서 고통을 받으면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잖아. 어차피 묘지로 돌아갈 텐데 살아있는 날 더 즐겁게 행복하게 살아야지. 돌아보면 생은 얼마나 아득한 길이었던가. 삶은 장밋빛 인생이 아니더라. 무에서 시작해 하나하나 이룬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세상인지 몰라. 얼마나 오랫동안 나의 의무에 충실했는가. 나의 최선을 최선을 최선을 다했다. 무에서 시작해 두 자녀 아빠 뒷바라지 다 하고 두 자녀 교육하고 두 자녀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해 아파트도 구입해 드리고 우리가 정든 집을 떠나올 때까지 매주 방문하곤 했다. 두 자녀 할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할 때도 나의 몫이 얼마나 컸던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수 차례 반복했지. 가시밭길을 헤치고 가시덤불을 헤치고 어둠 속을 헤치다 보면 장미 정원이 나오기도 하고 잠시 햇살이 들지만 폭풍이 휘몰아치면서 다시 어둠 속으로 빠져버린다. 희로애락이 없는 삶이 어디 있겠니. 하늘이 준 삶을 받아들이고 감사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더 좋은 날을 위해 매일 열심히 살다 보면 새로운 길이 열릴지 몰라.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걷는 게 얼마나 어렵고 도전인지 몰라. 노랗게 물든 뉴욕의 가을을 보면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시도 생각난다. 영락없이 내 인생 같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는데 먼 훗날 내 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40대 중반 어느 날 갑자기 준비도 없이 이민 가방 몇 개 들고 뉴욕에 오니 오래도록 숨쉬기도 힘들었지만 고통 속에 희망과 꿈의 씨를 뿌리니 세월이 흘러가니 점점 더 넓은 세상에 눈을 뜨면서 세상의 천재들 공연도 보고 세계 최고 성악가들의 오페라도 감상하고 있다.


삶이 뜻대로 되지도 않고 복잡하지만 나만의 행복을 찾는 것도 살아가는 방법이다. 평생 난 그렇게 살아왔다. 악기를 배우고 외국어를 배우면서 꿈을 꾸었지. 교직에 종사할 때도 퇴근하면 바이올린 연습을 하고 레슨을 받고 혼자서 외국어를 공부하고 책을 읽었지. 평생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나만의 세상을 추구하며 살았다.


러시 티켓 한 장에 25불, 뉴욕 물가에 비하면 이 보다 더 매력적인 것을 찾기 힘들 거 같아. 물론 오페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렇다는 말이다. 오페라에 관심이 없는 분이라면 무슨 말이니? 하고 반문할지 모른다. 세 시간 동안 세계 정상급 성악가들이 부른 아리아를 들으며 가을밤을 보내면 어찌 기쁘지 않으리.


매일 밤 바에 가서 술을 마시는 뉴요커도 많겠지. 오래전 이스트 빌리지에 무료 공연 보러 갔는데 맥주를 주문하라고 하니 그날 밤 공연도 안 보고 떠나왔다. 항상 지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오페라를 사랑하는 내게 러시 티켓은 충분히 가치가 있지만 기분 내키는 대로 바에서 맥주와 와인을 마실 형편은 아니니 자제를 하는 편이다. 꼭 필요한 우선순위를 생각하고 사는 뉴욕.


참 우울했던 화요일 갑자기 오페라를 보고 싶어 찾아갔는데 너무 좋아서 다시 오페라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우울한 기분이 저 멀리 날아갈 뿐 아니라 에너지도 준다. 수 천불 하는 명품백도 아니고 수백만 불 수 십만 불 하는 집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뉴욕 생활이지만 3시간 동안 오페라를 감상하는데 어찌 25불이 비싸다고 말하겠어.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가 발생해 수 천불이 그냥 하늘로 날아가기도 하고 살다 보면 원하지 않은 돈도 지출을 하게 된다. 병원비는 또 얼마나 비싸. 병원에 입원하느니 차라리 오페라 보고 천상에서 산책하면 좋지.


어제 구입한 패밀리 서클 입석표는 20불 +수수료. 가장 저렴한 티켓이지만 입석표라 서서 오페라를 봐야 하는데 러시 티켓은 수 백 불 하는 오케스트라 좌석에 앉아서 볼 수 있으니 정말 매력적이다. 특별 기금을 마련해 가난하지만 오페라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만든 프로그램이니 감사한 마음이 든다. 오페라 팬에게 뉴욕에서 최고로 멋진 선물은 메트 오페라다. 특히 러시 티켓을 구입한다면 축복이다. 공연을 사랑하는 분은 뉴욕이 특별한 도시임에 틀림없다. 매일 세계적인 공연을 감상할 수 있으니까. 때로는 무료로, 때로는 저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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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1735.jpg?type=w966 푸치니 <라보엠> 오페라



IMG_1733.jpg?type=w966 러시 티켓 좌석이 무대 앞 쪽이라 운이 엄청 좋았어.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은 19세기 파리에 사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삶과 사랑을 노래하는 작품이다. 크리스마스이브 배경인 오페라. 너무 추운데 땔감도 없는 예술가들. 밀린 렌트비를 받으러 집주인이 찾아오는 것을 보면 당시 파리에서도 렌트비 걱정하며 살았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뉴욕에 와서 렌트비가 공포란 것도 알았다. 매달 지불하는 렌트비. 한 달은 얼마나 빨리 흘러가는지 몰라. 추위에 벌벌 떠는 오페라 내용이 뉴욕 정착 초기 시절을 생각나게 한다. 우리가 살던 롱아일랜드 딕스 힐 집주인이 난방을 제대로 해주지 않아 라보엠 오페라가 더 가깝게 온다. 추위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한국에서는 잘 몰랐다. 오들오들 떨면서 도저히 참기 어려워 주인에게 난방을 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뉴욕은 다 이렇게 살아요",라고 대답하는 주인과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고 결국 롱아일랜드 제리코로 이사를 하고 말았다. 집주인도 어려운 처지라 난방을 따뜻하게 해주지 않았을지도 모르나 비싼 렌트비를 내는 내 입장에서는 황당한 일이었다. 참을 수 없는 추위는 죽음 같았다.



파리에서 가난하지만 자유롭게 사는 보헤미안의 삶을 표현한 작품도 나랑 비슷한 면이 많다. 문화 예술의 도시 뉴욕이라서 가난한 사람들이 받는 혜택이 무척 많아서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푸치니 역시 가난한 생활을 했기에 오페라의 원작 <보헤미안의 생활_앙리 뮈르제(Henry Murger)>을 더 감동 깊게 표현했는지 모른다.


푸치니 오페라를 보러 가기 전 메트 박스 오피스에 러시 티켓 찾으러 갔는데 손님들이 오페라 티켓을 구입하는데 시간이 오래오래 걸려 오후 4시 줄리아드 학교 더블베이스 대회에 늦고 말았다. 오페라 티켓 구입하는데 너무너무 오래 걸려 놀랐어. 난 단 한마디를 했지. 내 이름으로 된 저녁 티켓 달라고. 박스 오피스에서 일한 여직원은 내게 티켓을 전해주면서 미소를 짓더라. 다른 손님은 이거 저거 묻고 또 물으니 시간이 오래 걸렸지.


기쁜 마음으로 티켓을 받아 가방에 넣고 줄리아드 학교로 달리듯 걸었다. 그래도 이미 늦었다. 오후 4시 더블베이스 대회는 이미 시작되고 밖에서 벽에 걸린 스크린으로 공연을 보다 두 번째 학생 연주할 때 홀에 들어가서 감상했다.



피아노 반주에 맞춰 더블베이스 연주를 할 거라 기대했는데 나의 기대와 달리 베이스 바리톤이 부른 모차르트 곡도 들었다. 목소리가 얼마나 아름답던지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 떨어진 줄 알았어. 하늘에서 축복이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에콰도르에서 온 거리 음악가는 손님이 20불 주면 신의 축복을 받은 날이라고 표현했지. 음악을 사랑하는 내게는 음악이 축복이다. 멋진 공연을 보노라면 천국에 사는 신선이 된다.


IMG_1731.jpg?type=w966 줄리아드 학교 더블 베이스 우승 여학생


3명의 학생들이 참가했는데 두 번째 여학생이 우승을 했다. 솔직히 고백하면 난 바리톤 음성이 너무 아름다워 베이스 음색에 집중하지 못했다.


더블베이스 공연을 감상하고 오페라 보러 가기 전 줄리아드 학교 카페에 도착해 글을 쓰고 있다. 오페라 티켓 찾으러 가기 전 콜럼버스 서클 근처에 있는 메종 카이저에 들려서 아들이 좋아하는 빵과 바게트 한 개 구입했다. 오페라 보러 가기 전 링컨 센터에서 근사한 저녁 식사를 하면 좋을 텐데 아직은 복잡하니 내 형편에 맞게 살아야지. 커피 한 잔과 바케트 먹고 오페라를 보러 가야겠다. 둥근 테이블에 앉았는데 맞은편에 앉은 낯선 분도 샌드위치와 커피를 드신다. 학교 교수님인지 아닌지도 몰라. 근엄한 표정을 짓는 백인 중년 남자는 빵을 먹으며 핸드폰을 본다. 학교 카페는 천재 학생들로 가득하다. 재능 많은 천재들도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으며 간단히 식사를 한다. 콩쿠르에 우승하기 위해서 눈만 뜨면 음악과 호흡을 하는 학생들 역시 경쟁 사회에 시달리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미국 최고 명문 음대를 졸업해도 진로를 걱정하고 오케스트라에 입단하기도 어렵다는 소식도 가까이서 듣고 있다. 더 멋진 미래를 위해 명문대에 진학해서 졸업하는데 직장 구하기는 왜 하늘에서 별따기보다 더 힘들까.


줄리아드 학교 카페에서 글쓰기를 하는데 점점 밤은 깊어만 가고 창밖 풍경은 마치 메트 오페라 무대 같아서 놀란다. 메트 오페라 아리아도 아름답지만 무대 장식도 멋지고 조명도 예술적인 감각이 넘쳐서 황홀하다. 우연히 글을 쓰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니 메트 무대 같다. 오페라를 사랑하면 뭐든 다 오페라로 보이나 보다. 오페라는 나의 연인. 나의 연인은 메트 오페라. 우리의 사랑은 점점 깊어만 간다.


흐린 가을날 노랗게 물들어가는 가로수도 보고 줄리아드 학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글쓰기를 하고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곡을 감상하고 푸치니 오페라도 감상하니 오늘 하루는 영화 같아. 나도 모르게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버렸어. 슬픔 속에서도 작은 행복을 찾으러 매일매일 보물섬으로 떠나는 뉴요커의 방랑기를 읽는 독자분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모두에게 축복 가득한 날이 열리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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