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월 무얼 하며 보냈지.
10월 28일 월요일
흐린 가을 보며 종일 집에 머물고 말았어. 지하철을 타고 맨해튼에 가면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는데 노랗게 물든 이웃집 가로수를 보며 마음을 달랬지.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누가 그 비싼 그림을 구매했을까. 세상에 돈 많은 귀족들이 얼마나 많아. 귀족들 잔치도 구경할 수 있는데 집에 있었네.
낡은 색 지갑에는 영수증이 수북이 쌓여 있다. 한인 마트 식품비, 뉴욕 교통 카드, 맨해튼 아지트 커피값, 삼원각 탕수육 식사비, 카네기 홀 티켓 등. 한 달에 한 번 렌트비 보내는데 왜 그리 한 달이 빨리 지나갈까. 한 달 동안 난 무얼 하며 보냈지. 가을 정취 가득한 공원을 거닐어도 좋을 텐데 브런치 북을 정리하며 꽤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 한 달이 얼마나 빨리 흘러갔는지 몰라. 또, 카네기 홀에서 사랑하는 다닐 트리포노프 공연, 데니스 마추예프, 레오니다스 카바코스, 마크 앙드레 아믈랭, 뉴욕 팝스 등의 공연을 보기도 하고 뉴욕 시티 센터에서 마린스키 댄스 등을 보기도 했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공연 볼 때 베를린에서 온 피아니스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 즐거웠지. 10월에 열리는 가먼트 디스트릭트 아트 축제와 뉴욕 오픈 하우스 축제에도 방문해 다양한 작가들을 만나고 이야기도 했지.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1주일에 한두 번 수업을 받고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한 화가들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지인이 준 초대장으로 아트 페어 파티도 참석해 작품도 보고 국제 사진 센터에서 강의를 하는 사진가를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일본 아이스크림과 피자도 먹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일본 모자 디자이너 집에 초대를 받아 중년 여자 세명이 함께 수다도 떨며 행복한 시간도 보냈지. 그때 베를린 경제 소식이 안 좋다는 것을 처음으로 듣고 충격을 받았다. 통장에 저축한 돈이 마이너스 금리로 사라졌다고 하니 얼마나 슬퍼. 그 후 콜럼비아에서 수 십 년 전에 미국에 이민 온 중년 여자 남편이 코마 상태에 빠졌다는 슬픈 이야기를 듣고 멍했다. 틈 나는 대로 <한국 수필집 10월호>와 <언어의 온도> 책을 펴서 읽기도 하고 북 카페도 가고 줄리아드 학교에 가서 공연도 보고 프라하 록 음악 공연도 보고 첼시 갤러리와 로어 맨해튼 갤러리도 방문해 멋진 작품도 보았다. 파가니니 콩쿠르에서 우승한 바이올리니스트 공연도 보니 얼마나 기뻤겠어. 맨해튼 한인 타운 근처에 있는 ACE Hotel에서도 오페라 아리아를 감상했구나. 꽃밭 위를 나는 나비처럼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녔어.
카네기 홀과 뉴욕 시티 센터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무료 행사였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뉴욕은 문화 예술면에서는 매력 넘치는 도시다. 반면 비싼 생활비와 렌트비가 괴물이야. 괴물만 아니라면 뉴욕 생활이 백만 배 즐거울 텐데 괴물을 어찌 물리칠까.
괴물을 보내러 가을 아침에 파란색 우체통을 만나러 갔어. 왜 하필 아래층 할아버지를 만났는지 몰라.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더라. 그리스 이민자들이 성격이 쾌활하고 좋던데 무슨 인연인지 모르지만 운이 없게도 아래층 노인 부부와 사이가 안 좋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아마존에서 구입한 선풍기 켜니 소음공해라고 악을 쓰면 어떡해. 우리가 나비처럼 소리 없이 하늘을 나는 것도 아닌데 생활 소음에 대해 불평을 하면 할 말이 없다. 아래층에서 노래 부르는 소리도 들리고 이야기하는 것도 들리고 다 들려. 하나를 알고 둘은 모르나. 아래층에서 위층 소리가 크게 나면 위층도 마찬가지 아냐. 젊을 적 무얼 하던 분이었을까. 지난여름 플러싱에서 열린 유에스 오픈 팬 위크에 찾아가니 우리 집 선풍기와 비슷한 선풍기가 돌아가는데 모두 감사한 마음으로 선풍기 바람을 쐬었다. 선풍기 소음에 불평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파란색 우체통에 괴물을 보내고 집에 돌아와 아파트 지하에 세탁을 하러 갔다. 세탁기가 멈추지 않고 무사히 세탁을 마쳐 얼마나 기쁜지 몰라. 25센트 동전 한 개를 꿀꺽 먹어 버려 약간 속이 상했지만 홈리스에게 줬다고 생각해야지.
세탁을 하고 글쓰기를 하고 오랜만에 냉장고 청소도 했다. 말라비틀어진 무와 시든 채소도 버리고 오래된 음식을 버렸다. 쌈장도 새로 만들어 통에 담아두니 기분이 좋다. 가끔씩 빵과 쿠키와 케이크도 구우면 좋을 텐데 뭐가 바쁜지 쿠키 구운지도 너무너무 오래되어간다. 갓 구운 빵과 쿠키를 먹으면 얼마나 행복해. 뉴욕 정착 초기 매일매일 쿠키를 구웠는데 나의 에너지가 어디로 사라졌지.
식사 준비를 하고 늦은 오후에는 아들과 함께 한인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화수목금 4일 연속 비가 내린다고 하니 미리 장을 봐야지. 김치, 생선, 양파, 상치, 사과, 두부, 돼지고기와 고구마 등을 구입했다. 물가는 갈수록 조금씩 인상되어가니 마음이 무겁다. 10년 전에 비해 너무 많이 올랐다. 아들과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고구마를 샀으니 기분이 좋았다. 플러싱도 가을빛으로 물들어 가고 돌 담벼락 담장이 넝쿨도 빨갛게 익어가고 핼러윈 장식을 해둔 집도 군데군데 보였다. 우리 가족이 뉴욕 정착 초기 롱아일랜드 집집마다 핼러윈 장식이 멋졌는데 2008년 경제 위기 후 분위기가 썰렁해져 갔다. 저녁 식사 메뉴는 수제 돈가스. 아들이 망치로 돼지고기를 두드리면 더 부드럽고 맛이 좋다고 하는데 특별한 맛을 느끼지 못했다.
아름다운 시월도 며칠 남지 않았네. 그러고 보니 뉴욕을 지옥의 불바다로 만든 허리케인 샌디가 온 것도 시월 말경이었다. 무시무시한 공포였다. 뉴욕은 물바다로 변하고 거리 가로수는 다 쓰러지고 전기는 정전이 되니 캄캄한 밤을 보냈다. 주유소에 가면 몇 시간 동안 줄을 서서 기다리고 마치 전쟁터 같았어. 그 무렵 단풍이 무척 아름다울 때라 폭풍이 온다고 했는데 한국에서 폭풍이 뭔지 잘 알지 못해서 운전을 하고 단풍 구경하러 갔다. 차에 내비게이션도 없는데 갔구나. 가을 풍경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찾아갔을까. 얼마나 철이 없었는지 몰라. 20대도 아니고 30대도 아닌 40대 중년 여자가 가을 풍경 보러 드라이브하러 떠났다. 그것도 혼자서. 노랗게 물든 단풍을 봤다.
허리케인이 지나면 나뭇잎이 다 떨어져 버려 예쁜 단풍을 볼 수 없을 거 같아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생가 Sagamore Hill을 찾아가 단풍 구경을 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 많고 많은 아파트 가구에서 우리가 사는 아파트 지붕이 날아가 한 달 동안 수선을 했다. 천정이 무너져 내리고 물이 쏟아졌다. 집이 난장판으로 변했어. 잊지 못할 슬픈 추억이야. 허리케인이 온다는 일기예보를 듣는다면 미리 비상 식품을 구입하고 비상시 대비를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모른 철부지 어린아이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뉴욕에 와서 힘들고 슬픈 일도 무척 많았다. 참 힘든 세월을 견디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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