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한숨 돌리려는데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누구세요?"
"절에서 나왔습니다. 시주 부탁드립니다."
저희 아파트 경비실 앞에는 절이 있습니다. 20년 가까이 이사를 가지 않고 살다 보니 가톨릭 신자인 저도 집 앞 절을 보면 정답게 느껴집니다. 당연히 집 앞 만수사에서 나오신 줄 알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어디서 나오셨어요?"
"수원에서 왔습니다."
"멀리서 오셨네요?"
"수원은 멀지 않아서 괜찮습니다."
"쌀 조금 시주 부탁드립니다."
저희 친정아버지가 직접 농사를 지어서 보내주신 쌀로 가득 드렸습니다."
좋은 곳에 쓰신다고 하니 큰 건 아니지만 정성이 깃든 쌀로 드리는 마음이 좋았습니다.
"인심도 후하시고 인상이 너무 좋으세요. 감사해서 저희가 기도를 해드릴게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그분들의 칭찬에 그만 이름을 말하고 말았습니다.
"생년월일 알려주시면 좋습니다."
"저는 00년 00월 00일입니다."
나도 모르게 이름과 생년월일을 말하고 있었다.
"선생님 태어나신 날이 너무 좋네요. 남편분도 알려주시면 같이 기도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아들들 것도 알려주세요.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참 기도드리니 감사 기도비 조금 주세요"
저의 인상과 저의 인품을 엄청 칭찬해 주시며 묻는 와중에 저의 개인 정보를 술술 말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정신을 챙겨 저의 남편과 아들들의 기도는 괜찮다고 알려드리지 않았습니다.
순간 기안 84가 생각났습니다. 기안 84가 인도여행을 하며 길에서 마주치는 종교인들에게 갑자기 돈을 드리게 되고 얼굴에 힌두교 문양을 그리게 되는 장면 말입니다.
이분들도 5분도 되지 않는 시간에 저의 개인정보를 말하게 하였고 쌀뿐 아니라 저의 감사 기도비까지 챙겨드리게 되었습니다.
만원만 달라고 하셨는데 다행히 제가 잔돈이 없어 가지고 있던 온누리 상품권으로 드렸습니다. 상품권이 없었다면 저는 5만 원을 드리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털리고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사기를 당한 것 같다고 느껴졌지만 말입니다. 그분들이 진짜 절에서 오셨든 그렇지 않든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이 듭니다. 제가 쌀과 복비를 드리며 기분이 매우 좋았습니다. 나와 상관없는 분들이 나를 위해 기도를 하든 그렇지 않든 내 마음이 기도를 드렸다고 생각이 들었거든요. 기안 84도 복비를 깎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드리는 순간아마도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를 함께 빌어주는 마음은 아주 중요하고 큰 마음이니까요.
저의 남편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더니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었다고, 큰일 난다고 걱정을 합니다. 저도 겁도 없이 현관문을 열어주는 행동은 조심해야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돌아가신 시아버님 생각이 납니다. 저의 아버님은 지하철을 타든 길거리든 어려운 분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셨습니다.
"아버님 저 사람들 다 사기래요. 몸도 불편하지 않고 조직에서 관리해서 돈도 다 가져간데요"
하고 말씀드리면 허허 웃으시면서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10명 중 1명이라도 어려운 사람일 수도 있지 않겠니?"
오늘 일을 겪고 보니 아버님도 또 기안 84도 이런 마음으로 그렇게 행동하시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사기이든 아니든 나의 생각이 옳고 내가 휘둘리지 않으면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