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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정상 이후에 비로소 보인 것들

by 그라미의 행복일기

정상에서 발길을 돌려
조심스레 관음사 방향으로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한 일이 하나 생겼다.


함께 걷던 친구의 휴대폰 배터리가
거의 다 되어 갔다.


제로포인트 인증은
모두 앱으로 기록해야 한다.
배터리가 나가면
그동안 쌓아온 모든 걸음은
풍선처럼 터져 사라져 버린다.
다시 그 구간만 걷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는 급하게 주최 측에 문의했다.


“거의 다 왔는데… 어떤 방법도 없을까요?”


하지만 돌아온 답은
단호하고도 간단했다.


“불가합니다. 모든 도전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순간 야속했다.
‘지금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마음이
작게 일렁였다.


하지만 곧 알 수 있었다.
원칙이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하면
얼마나 많은 혼란이 생길지.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
그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도전의 의미도 흐려진다는 걸.


그래서 이해했다.
지켜야 하는 건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시작 선과 끝 선을
똑같이 만들어주는 질서라는 것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는 내 충전기를 주고 싶었지만
기종이 달라 연결할 수 없었다.
그 순간의 답답함은
정상에서 느꼈던 성취감보다
더 크게 가슴을 두드렸다.


바로 그때,
하산하던 한 분이
우리의 상황을 들은 듯
조용히 다가와 충전 잭을 건넸다.


“필요하시면 이거 쓰세요.”


갑자기 나타난 손길은
말 그대로 한 줄기 빛이었다.


우리는 여러 번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했고,
주소를 알려주면 꼭 돌려드리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분은 미소 지으며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다음에 이런 분 만나면 그때 똑같이 해주세요.”

그 말이 하산길 가장 깊은 곳에 단단하게 새겨졌다.


산에서 자주 듣던 말.
“산에 오는 사람들은 다 천사다.”
그 말이
그날만큼은 그냥 인사가 아니라
정확한 사실처럼 느껴졌다.


그날 이후
나는 언제나 보조배터리를 넉넉히 챙긴다.
무겁더라도 괜찮다.
언젠가,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순간이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한라산에서 얻은 가장 큰 배움은
정상의 높이가 아니었다.
사람이 남긴 따뜻한 온기였다.


원칙은 지켜져야 하고 도움은 흘러가야 한다는 것.


그 단순한 진실이
한라산 제로포인트 도전을
조용히 완성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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