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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정상 직전, 멈추고 싶었던 마지막 2.3km

by 그라미의 행복일기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면
정상까지 2.3km.
거리만 보면 짧아 보이지만
한라산에서 이 구간은
항상 ‘가장 긴 길’처럼 느껴진다.


대피소를 벗어난 순간부터
경사와 바람은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
평탄했던 데크길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돌길과 돌계단이 쉴 새 없이 이어진다.


해발이 높아질수록
바람은 몸을 밀고
숨은 얕아지고
걸음은 점점 작아졌다.


“여기까지만 갈까?”
그 말이 마음에서 살짝 고개를 들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호기심으로 시작한 도전이었고
굳이 정상에 서지 않아도
내가 걸어온 길의 의미는 충분했다.
그런 생각이 잠시 스쳤다.


하지만
진달래밭에서 잠시 쉬며 바라보았던
내가 걸어온 긴 길이
갑자기 마음 한가운데로 되돌아왔다.


해발 0m에서부터
도시의 새벽을 지나
성판악 숲을 지나
속밭 대피소를 지나
여기까지 걸어온 나.


내가 스스로 시작한 걸음이니
마무리도 내가 하고 싶었다.


그래서 속도를 완전히 낮췄다.
누가 먼저 앞질러가든
누가 뒤에서 따라오든
그건 상관없었다.


오직 내 숨, 내 리듬만 지키며
한 발 한 발 천천히 올랐다.


돌길 사이로
얼음이 희미하게 박혀 있는 구간이 있었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
잠시 몸을 기울여야 하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 모든 순간이
이제는 ‘길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멀리 정상 표지목이 보였다.


기쁨보다 먼저 찾아온 건
묘한 안도감이었다.
‘드디어 끝났다’보다는
‘그래,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그 감정이
천천히, 깊게 마음에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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