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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다시 찾은 첫 1km,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

by 그라미의 행복일기

(지리산 제로포인트 2일 차)


아침에 일어나
전날 해가 져서 가지 못한 1km 구간을 다시 걸었다.
고작 1km인데
어젯밤의 나는 그 길이 그렇게 무서웠다.


전등을 켜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길이었지만
산이라는 단어가 마음을 눌렀고
가보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내 발을 붙잡았다.
오늘 다시 걸어보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길이었다.
그저 어제의 나는
불확실한 어둠 앞에서
스스로 겁을 크게 만든 것뿐이었다.


걸으면서 계속 같은 생각이 들었다.


“왜 그렇게 무서워했을까.”
해보면 되는 일인데
가끔 나는
큰 그림만 보고
작고 중요한 ‘디테일’은 놓칠 때가 있다.
길이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
지형이 어떤지
미리 조금만 더 살펴봤다면
어제의 그 두려움은 덜했을 것이다.


아마도
‘가보지 않은 길’ 자체가
나에게 늘 조금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걷다 보니 익숙한 장소가 나타났다.
예전에 이 길을 걷다가
고사리를 캐던 할머니를 만나
한참을 이야기 나눴던 곳이었다.
그때는 너무 신기하고 반가워서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었는데
지금 그 자리 앞에 서니
괜히 마음이 콱하고 막혔다.


집에 돌아와 예전 자료를 찾아보니
정말 그 장소가 맞았다.
어떻게 그 기억이 남아 있었을까.
사소한 인연이었는데
오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르신, 잘 계시겠지.
그때 고사리는 어떻게 따고,
그 동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놓으셨는지
아직도 생생하다.
이번엔 뵙지 못했지만
건강하게 잘 지내시기를
길 위에서 조용히 빌었다.


길은 다시 이어졌다.
또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예전엔 이런 소리가 정말 무서웠는데
이젠 조금 웃음이 났다.


“얘들아, 너희도 너희 자리 지키느라 수고 많지.”


강아지들이 짖는 건
그저 자기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예전엔 그걸 두려움으로만 느꼈는데
이제는 조금 여유가 생긴 건지
무섭다가도 괜히 미안하고 고마웠다.


길 옆에는
감나무가 줄지어 있었다.
신기하게도
나무마다 감이 한두 개씩 남아 있었다.
농부가 깜빡한 게 아니라
새들이 먹을 몫으로 남겨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보고 있는데
가슴이 따뜻해졌다.


얼마 전 설악에서 보았던
다람쥐 먹이를 위해 돌 위에 올려두었던 땅콩처럼.
보이지 않는 배려가
누군가에겐 삶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길은 계속 궁금함을 품게 하는 풍경이었다.
왼쪽으로는 섬진강이 흐르고
봄이면 벚꽃이 가득 폈을 풍경이
지금은 단풍이 떨어져
가을의 마지막을 알리고 있었다.


‘이 길의 봄은 어떤 모습일까.’
걷는 내내
그 상상을 여러 번 했다.


지리산으로 가는 길은
단순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아니라
내 안의 감정들도
오르락내리락하게 만드는 길이었다.


새로운 길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
기억 속 인연이 주는 따뜻함,
생명을 남겨두는 자연의 배려,
그리고 어제보다 조금 단단해진 나.


그 모든 것이
오늘 하루의 걸음 안에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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