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양산을 지나 발걸음이 금정산을 향하기 시작했다.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멀지 않은 것 같다가도
막상 걷기 시작하면 꽤 길게 느껴지는 구간이었다.
해는 조금씩 기울고 있었고 어둠은 생각보다 빠르게 내려왔다.
친구는 “금정산이 이렇게 멀었나?” 하며 몇 번이고 투덜거렸다.
사실 나도 금정산을 이렇게 늦은 시간에 오른 적은 없었다.
익숙한 길이지만 깜깜한 산속에서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조용하고, 길고, 긴장되는 그 묘한 공기 속에서 둘 다 자연스럽게 말수가 줄었다.
그러다 갑자기 옆 숲에서 ‘후다닥’ 소리가 크게 났다.
친구가 놀라며 말했다. “멧돼지다!”
나는 보지 못했지만 친구는 확실히 봤다고 했다.
덕분에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울타리가 있긴 했지만 이 시간에 산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순간 조금 무겁게 다가왔다.
그래도 걸어야 했다.
도전의 시간제한이 있었고 돌아갈 길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원효봉에 도착해 잠시 숨을 고르며 야경을 바라봤다.
멀리 번지던 부산 불빛은 생각보다 더 밝고 넓었다.
친구는 “부산 야경 좋네” 하고 짧게 말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저쪽은 해운대고, 저쪽은 어디고…
몇 가지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게 잠시 쉬고 다시 북문으로 향했다.
북문으로 가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이 이어졌다.
어둠 속에서 둘 다 말없이 조심조심 걸었다.
헤드랜턴 불빛 하나에 의지해 길을 찾아 내려가는 기분.
이럴 때는 누구라도 조용해진다.
북문에 닿자 친구가 물었다.
“고당봉까지 얼마나 남았어…”짧게 대답했다.
“조금…근데 거의 다 왔다.”
다시 오르막. 친구도 평소에는 산에 강한 편인데
오늘은 확실히 힘들어 보였다.
괜히 내가 먼저 제안한 도전이라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드디어, 고당봉 정상에 도착했다.
낮에는 늘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지만
그 시간의 정상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바람 소리만 들렸다.
정상석 앞으로 가는 순간
친구가 갑자기 크게 말했다. “어?! 뭐야! 완주했다고 뜬다!!”
친구의 휴대폰에 완주 축하 알림이 나타난 것이다.
하루 종일 힘들어하던 친구 얼굴이 순간 환하게 밝아졌다.
그 표정을 보니 나도 같이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내 휴대폰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처음엔 그냥 잠시 오류겠지 했다.
그러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고, 심지어 30분이 지나도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정상석 근처를 왔다 갔다 하고, 폰을 껐다 켜고,
앱도 다시 실행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때부터는 친구가 더 조급해졌다.
“야… 혹시 내 배터리 때문에 그런 거 아니가? 내가 네 배터리 많이 썼잖아… 미안하다.”
친구 말대로 오늘 하루 동안 내 보조배터리는 거의 친구에게 갔고
막상 내가 필요할 때 배터리가 충분하지 않았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부산 사는데 뭐. 안 되면 다시 하면 되지.”
그러자 친구가 단호하게 말했다.
“혼자서? 방금 멧돼지 못 봤나. 그건 말도 안 된다.”
친구는 한번 더 시도해보자고 했다. 하지만 바람이 점점 차가워지고
열차 시간도 있어서 더 이상 지체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친구도 더 이상 버티지 않고 나의 결정의 동의했다. 그냥 내려가기로 했다.
하산길의 바람은 생각보다 차가웠고 머릿속은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친구를 역까지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이 도전을 하고 싶었던 걸까?”정확한 답은 없었다.
그냥 하고 싶으니까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늘 내 방식이었으니까.
다음날, 주최 측에서 연락이 왔다.
사진과 기록을 확인했다며 정상 인증을 승인해 준다고.
친구에게 소식을 전하니 나보다 더 기뻐했다.
그리고 말했다. “근데… 나는 앞으로 이런 도전은 안 한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너는 안 해도 되고 나는… 또 찾고 있네.”
요즘 눈길과 마음이 가고 있는 건 "제주 한라 윗세 "
서귀포 해변 해발 0m인 중문색달해수욕장에서 출발해 윗세오름까지 오르는 길이다.
가끔 스스로도 생각한다.
“이런 나를 어쩌면 좋지?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또 웃음이 났다.
못 말리지, 정말.
친구의 말 대로, 나는 참..
못 말린다.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걸어갈 길
이 도전은 누군가에게는 특별할 것도 없고 누군가에게는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내 삶을 다시 세우는 과정이었다.
한라산에서 시작해,서울의 다섯 산을 지나,설악산의 첫눈을 만났고,
지리산에서 두려움을 마주했으며,부산을 걷는 동안 옛 기억들이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어떤 날은 작은 두려움 때문에 멈췄고,
어떤 날은 예상보다 멀리 걸었고,
어떤 날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발이 가는 대로 걸었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도전은 나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나를 다시 보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길을 걷는 동안 나는 나의 속도를 알게 되었고,
어디에서 멈추고 어디에서 다시 시작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누구와 비교할 필요도,누구를 따라갈 필요도 없었다.
그저 나의 리듬대로나의 방향으로 걸어가면 충분했다.
해발 0m에서 시작한 이 여정은 결국 내 안의 0m로 돌아오는 과정이었다.
겉으로는 같은 출발점 같아 보이지만 매번 조금씩 다른 나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앞으로도, 어떤 0m 앞에 서게 될지 알 수는 없지만 두렵지는 않다.
나는 나의 속도로 천천히 다시 걸어가면 되니까.
급할 것도 없고 완벽할 필요도 없다.
어제보다 조금 더 다정한 마음으로 오늘의 나를 믿으며
다음 길을 향해 가면 된다.
이 도전은 끝이 아니라 다음 걸음을 위한 조용한 쉼표일 뿐이다.
언젠가 또 다른 0m에 서게 될 그날을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