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예지 Oct 17. 2022

“나다운 언어로 나만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스토리 경험 디자인 그룹  ‘필로스토리’ 채자영 공동 대표

1)이름 : 채자영
2)프로필  :  방송 현장, 비즈니스 입찰 현장, 브랜딩 현장까지 10년째 ‘말’의 본질을 탐구하며 ‘이야기’의 가치를 전하고 있는 사람. 현재 스토리 경험 디자인 그룹 필로스토리의 공동대표이자 브랜드 스토리텔링 전문가, 입찰 전략 컨설턴트, 브랜드 에세이스트, 유튜버, 모더레이터, 한국수사학회 교육이사, 두 아이의 엄마라는 다양한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인 ‘이야기’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 믿는 ‘프리젠터’의 합성어인 ‘스토리젠터(Storysenter)’라는 이름으로 철학과 예술, 비즈니스의 경계를 넘나들며 ‘세상에 꼭 전해져야 하는 이야기를 말하는 일을 하고 있다.
3)직업 : 스토리젠터, ‘필로스토리’ 공동 대표
4)대표 저서  :  <말가짐>, <실전 프레젠테이션 이야기>, <밀레니얼 패밀리의 탄생>
5)홈페이지: https://philostory.com/
6)SNS
- 인스타그램
채자영 대표 : https://www.instagram.com/storysenter_jy/(8,394명)/필로스토리 : https://www.instagram.com/philostory__/(1,832명)
- 브런치 : https://brunch.co.kr/@jayoungchae






나다운 언어로 나만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스토리 경험 디자인 그룹 ‘필로스토리’ 채자영 공동 대표


과장에서 팀장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가지 못한 이유

돌이켜 보니 회사에 다닐 때 사원에서 대리가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다행인 건 대리에서 과장이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첫 번째 기획사에서는 잡지사, 출판사, 복합문화공간의 운영팀이면서 강의 기획 서포트를 했던 경력을 주원료 삼아 주니어 기획자로서 기본기를 닦아가느라 정신없었다면 두 번째 기획사에서 묵묵히 일하는 나를 신뢰해준 동료, 성실하게 제 몫을 해내는 나를 인정해준 상사를 만난 덕분에 시니어 기획자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시 내가 맡고 있던 주요 업무는 대기업 사외보 월간지, 타블로이드 판형 격월간 소식지, 청소년 대상 계간 매거진을 기획하고 실무를 진행하는 일이었다. 월평균 취재를 포함해 10개 이상의 기사를 작성하고, 청탁한 외주 원고를 가다듬고, 후배 기획자의 기사를 봐주며 취재 현장에 데려가 촬영 핸들링을 하고, 틈틈이 다음 호 기획안에 들어갈 아이템을 발굴했다. 메인 업무 외에도 신규 프로젝트 수주를 위한 제안서를 비주기적으로 작성했으니 매분 매초가 정신없이 흘러간 시절이었다.


회사 소식 혹은 임직원 뉴스로 주로 구성되는 사보보다는 외부 필진과 대중적인 아이템으로  다양하게 콘텐츠를 구성하는 사외보를 만드는 일이 좀 더 재밌었다. 그러나 운이 좋으면 몇 년씩 대행사 변동 없이 진행하는 사보와는 달리 사외보는 1년 혹은 2년에 한 번씩 대행사 교체라는 이슈를 몸소 겪어야 했다. 이 과정은 전부 프레젠테이션이라는 지난한 과정 끝에 선정되었는데, 이 일을 어느 정도 해내는 ‘외력’은 생겼음에도 그 시기를 현명하게 보낼 만한 ‘내력’은 여간해선 생기지 않았다. 편집 대행사의 프레젠테이션이라 함은 기업체에서 원하는 홍보물의 주제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편집 디자인 제안서와 ‘제안한 디자인’을 최적화해서 구현한 홍보물 샘플을 고객사 임원들 앞에서 20분 내외로 소개하고 질의에 응답하는 과정이다. 종류는 매거진, 브로슈어, 리플릿, 달력, 다이어리, 가계부 등을 가리지 않았다. 이따금 편집 제안서와 디자인 샘플 제출로 끝나는 프레젠테이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실무를 처리해내는 데 품이 덜 드는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은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어김없이 진행해야 했다.


소규모로 운영되는 기획사는 어느 곳이나 비슷한 시스템으로 운영되겠지만 ‘과장’ 정도의 직위가 되면 프레젠테이션을 전반적으로 진행할 수 있어야 한다. ‘차장’을 지나 팀장’이 되면 수주를 위한 프레젠테이션은 거부할 수 없는 필수 업무 영역이었다. 그즈음 제안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핸들링할 수 있을 정도로 문서 작업은 스킬 업  했지만, 제안서의 흐름을 리드미컬하게 운용하며 ‘문서화’된 언어를 ‘언어화’로 전환하는, 이른바 ‘프리젠터’로서의 역할을 하기엔 역량이 모자랐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데다, ‘승진’의 기회를 잡고 싶을 만큼 일에 대한 욕심이 크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회사를 나와 세 번째 기획사로 이직했을 때도 비슷한 문제에 봉착했다. 갑작스레 팀장 자리가 공석이 될 상황에 처하자 대표 님으로부터 받은 제안은 “어때, 류과장이 기획팀을 맡아볼래?”였지만 해내고 싶다는 자신감보다는 못해내리라는 두려움이 앞섰다. 당시만 해도 회사 매출의 대부분이 프로젝트 수주를 통해 이루어진 만큼, 그 책임을 감당할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그건 형식적인 제스처에 불과했다. 결국 제안을 기회로 바꾸지 못한 채  (프레젠테이션을 하지 않는) 이른바 실무 처리자인 ‘과장’으로 남았다. 물론,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승진은 더딜지라도, 보다 잘할 수 있는 업무를 잘 해내는 선에서 회사의 보탬이 되고 싶었다. 어떤 이의 눈에는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는 상황에서 선택한 자발적 ‘퇴보’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걸 ‘퇴보’라고 뭉뚱그려서 부르고 싶지 않다. 그저 속도전이 중요한 기획사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든 내 속도대로 살아가고 싶었던 한 평범한 인간의 ‘생존법’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어떨까.


도무지 말할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 시간

회사를 나와 프리랜서 기획자가 된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말할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  단발성으로 진행한 외주 편집 작업들은 대부분 이메일이나 유선 통화로 이루어졌다.  (더욱이 프리랜서를 선언한 2020년 초반 코로나19가 터졌기에 사람들을 대면할 기회는 점점 더 사라졌다.) 그러다 보니 강력하게 ‘원한 바’는 아니었지만 점점 더 ‘말하기’와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편했다. ‘이거야 말로 내가 원했던 바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작가로서 커리어를 쌓고 싶었기에 오로지 나에게 내밀하게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첫 에세이집을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탈고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게도 글쓰기 시간을 집중적으로 보낸 덕분이다.


첫 책 출간 후 출판사 대표 님의 마당발 영업 전략 덕분에 두 건의 유튜브와 한 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있었다. 책이 막 출간된 2021년 1월, 약국 안 책방으로 잘 알려진 ‘아직 독립 못한 책방’에서 운영 중인 ‘아독방 유튜브 라이브’, 4월에는 서울 책보고에서 진행하는 ‘어디서든 북콘서트’,  5월에는 경인방송 FM <엄윤상이 만난 사람과 책>이 그렇다. 관련 프로그램은 책방 대표 님과 프로그램 담당 작가님이 준비한 질의서로 진행되었고,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에 며칠에 걸쳐 적절한 답변을 준비했던 기억이 난다. 라디오 녹음 날, 테이블에 올려놓은 페이퍼를 만지작거리며 긴장감을 누그러뜨리던 내게  DJ 분이 건넸던 말은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지만.


“작가 님, 페이퍼에 너무 의존하지 마시고요. 자연스럽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아직 독립 못한 책방 ‘아독방 유튜브 라이브’ 방송 중 @류예지
서울책보고 ‘어디서든 북 콘서트’ 촬영 현장 @류예지
경인방송 FM <엄윤상이 만난 사람과 책> 녹음 현장 @류예지


그때 말하기에 있어 중요한 것은 ‘능숙함’보다는 ‘자연스러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필요한 것은 내가 아는 것을 솔직 담백하게 전달하되, 되도록 청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는 일이라고. 그런데 자연스럽게 말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성실한 준비’가 선행되어야 했다. DJ 분의 말 한마디가 긴장감을 덜어준 것은 분명했지만, 문제없이 녹음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사전 질의서에 대한 나만의 답변을 충실히 준비한 후 머릿속으로 충분히 시뮬레이션해보았기 때문이다.  그날, 라디오 녹음을 마친 후 지하철을 타고 터덜 터덜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왜 회사를 다닐 때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프레젠테이션 할 때 왜 그렇게 두려웠을까? 수주를 하기 전에 수주를 하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이었을까? 아니면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자연스럽게 말하지 못하고 어버버 거릴 거라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공식적인 프레젠테이션이 아니더라도, 클라이언트와의 공식적인 만남은 기획자라면 늘 주기적으로 치러내야 하는 업무 중 하나였다. 기획 회의로, 단발성 프로젝트 건으로 대면하는 일은 허다했다. 얼굴 붉힐 이슈로 거래처에 불려 간 적도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런 자리에서조차 회사가 마련한 해결안들로 담당자들을 설득해야 했다. 나는 인물 인터뷰, 프로젝트 별 소규모 기획 회의 미팅에 강한 편이었지만 그것은 기획자의 기본 역량에 속할 뿐 강점으로 인식되진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대행사 교체 시기인 10월과 11월, 공식적인 프레젠테이션 시즌이 다가오면 늘 긴장감 속에서 살았다. 일에 도움이 되는 긴장이 아닌 잠식될 것 같은 불안에 가까운 그 감정은 언제나 프레젠테이션을 성공적으로 치러낼 수 없으리란 의심과 연결되었다. 불안함과 두려움은 기획자로  살 때마다 늘 따라다닌 고질적 ‘문제’였지만, 나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몰랐다.


말할 기회가 주어져도 말하지 못해 애를 먹었던 조직에서 기어이 나와 프리랜서 작가가 된 이후에는 좀처럼 말하고 싶은 데도 말할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 두 번째 에세이집을 출간한 후에는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연락이 오는 매체가 없었다. 한 권의 인터뷰집과 두 권의 에세이집을 출간한 이력은 몇 줄의 타이핑으로 정리되었고, 나는 출간 작가이지만 동시에 유령작가인 채로 정체되었다. 책이 출간된 다음에는 한동안 내 손을 떠난 이야기가 ‘독자’의 생각과 생각을 타고 유유히 흘러가는 모습을 가만히 구경하는 일이 좋았다. 기쁨은 아주 잠시였다. 어느새 대형서점 서가 깊숙이 들어간 책을 마주해야만 했을 때,  혹은 기대를 품고 찾아간 책방 구석에 -책방 관계자조차 쉽사리 찾지 못하는-위치에 놓인 책을 발견했을 때가 그랬다.


세상과 연결되고 싶어 글을 썼다. 나를 대신해 글이 ‘흘러가’ 어딘가에 ‘닿게’ 되길 바랐지만 그러지 못한 채 ‘정체’된 것 같았다. 정체감은 단절감으로 이어졌다. 단절감이 주는 서글픔, 서글픔에 잠식당한 후론 문득문득 고개를 드는 자괴감과 싸워야 했으니, 내가 글을 써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에 대한 목표가 한순간에 (깡그리) 증발된 느낌이었다. 틈틈이 극복해보기로 한 건, 서글픔을 그저 서글픔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싶지 않아서였다. ‘무기력’이니 ‘자괴감’이니 하는 부정적인 감정과 얽히고설키는 것 역시도 지양하고 싶었다.  닫힌 문을 한 번 열어보자! 어느 날 분연히 소리쳤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새로운 ‘말할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 기회의 문을 잡을 수 있으리라고.


나는 그저 한 발자국 '밖'으로 더 나가고 싶었을 뿐이다.


고유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브랜드, 필로스토리

연남동에는 기록상점이라는 공간이 있다. 기록상점은 로컬 동네를 경험하는 새로운 콘텐츠를 수집, 발굴하고 가공해 해당 지역의 가치를 높이는 고객 경험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창작집단 ‘어반플레이’가 연남동에 ‘스토리텔러를 위한 라운지’로 만든 복합문화공간이다. 처음에는 기록상점에 대한 호기심으로 자료를 서치 했는데, 어쩌다 보니 기록상점에 입점한 브랜드에 하나씩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정확히는 커리어 브랜딩에 대해 조금씩 공부하게 되면서 ‘프레젠테이션’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다. 그 관심으로 채자영 공동 대표를 팔로우하게 되었고 그가 운영 중인 ‘필로스토리’와 기록상점의 연결성, 이를 가능케 한 어반플레이의 ‘쉐어 빌리지 프로젝트’까지 한눈에 파악하게 된 것이다. 어반플레이가 연남동 쉐어 빌리지 프로젝트의 협업 크리에이터로 필로스토리를 영입한 후, 골목길의 평범한 주택을 개조해 만든 기록상점은 연남동을 ‘경험’하게 하는 새로운 공간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있다.


연남동 기록상점. 크게 손대지 않은 외관의 붉은 벽돌이 주변 공간과 친근하게 어울린다. @류예지
기록상점 3층에 입주해 있는 '필로스토리' @류예지


필로스토리는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빛나는 이야기가 있다’는 철학을 기반으로, 개개인이 고유한 이야기 자산을 발견하고 명확한 메시지로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툴킷과 워크숍, 경험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선보이는 곳이다. 필로스토리는 가장 매력적인 이야기는 이미 내 안에 존재하는 이야기이고,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없는 것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각자가 가진 것을 창조적으로 바라보고 재해석하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필로스토리를 이끌고 있는 채자영 공동 대표는 대학 졸업 후 아나운서로 일했지만, 그토록 원했던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자신과 맞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업직종 전환을 하게 된다. 바로 전문 프리젠터로 대기업의 입찰 전략 현장을 누비게 된 것. 그는 10년 가까이 일하며 매출 2천 억을 수주시킨 그야말로 ‘말’로써 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다. 전문 프리젠터로서 자신의 업에 대한 확신이 컸지만 한계를 설정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다시 한번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를 위해 일의 확장, 스스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시험해보던 중 자신이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온 단어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가슴이 뛸 정도로 자신 안에서 반짝이는 단어, 그것은 바로 ‘스토리’였다.



2층 쇼룸에서 만난 필로스토리의 퍼스널 브랜딩 툴킷 @류예지 


채자영 공동 대표는 스토리를 삶의 중요한 영역으로 끌어오기로 결심하고, 이를 기업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스토리를 가다듬고 맥락을 잡아가는 데 활용한다.  그렇게 2019년 4월,  김해리 기획자와 공동 창업의 뜻을 모으게 됐고 스토리 경험 디자인 그룹인 필로스토리를 탄생시키게 된다.  이후 필로스토리는 대기업 현대백화점의 리브랜딩 전략 슬로건 작업, 로컬 스몰 브랜드의 이야기를 전하는 ‘메이드 인 성수(Made in Seong su)’, 스토리텔러를 위한 창작/교류 공간인 연남동 ‘기록상점’ 오픈, 안산시 고잔동과 함께한 ‘기억산책’, 기록상점에서 진행한 ‘새 이름 짓기’ 클래스까지, 이야기를 개발하고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개인, 기업, 로컬을 아우르며 다양하게 진행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지난 시간 프레젠테이션이라는 치열한 현장 안에서 고군분투하면서도 채 대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자신만의 도구가 ‘이야기’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발견해낸 덕분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이름을 부여하는 일

2015년부터 채자영 공동 대표는 ‘스토리젠터’라는 네이밍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나만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지인과의 자리에서 ‘Story’와 ‘Presentation’의 합성어인 ‘스토리젠터’라는 네이밍을 탄생시켰다. 맨 처음 ‘스토리젠터’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나보다 앞서 ‘스토리젠터’라는 이름에 물음표를 달았을 수많은 사람들처럼 호기심과 함께 ‘자신을 소개하는 데 있어 이처럼 적확한 호칭이 있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평범한 단어의 조합이었지만, 맥락을 따져 보면 채자영이라는 한 사람의 이력을 탐색하며 느낀 모든 것이 고스란히 집약되어 있다. ‘스토리젠터’는 호명하는 이로 하여금, 이야기라는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들게 함은 물론 그 사람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바로 프리젠터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채자영 공동 대표는 자신의 최근 작인 <말가짐>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불변하는 ‘스토리젠터’라는 이름에, 변화하는 다양한 수식 문장을 스스로 덧붙일 수 있어야 한다고. 예를 들어 2020년에는 ‘이야기를 설계하는 스토리디렉터’라는 문장으로 자신을 표현했다면 2021년에는 ‘세상에 꼭 전해져야 하는 이야기를 말하는 프리젠터’로 변경해 표현해보는 것이 그렇다. 사람도, 정체성도, 상황도 고정되지 않고 변해갈 수밖에 없는 시대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법’을 개발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 물론 그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요소를 보여주는 일 역시 그만큼 중요하다는 데 방점을 찍는다. 이를 테면 추구하는 가치, 내가 되고 싶은 내 모습, 단단히 굳어 삶을 지탱하는 단어들, 다시 말해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로 자신을 표현하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소비자들에게 보여주는 일이 그렇다.


생각해보면 자신을 브랜딩 하는 데 능숙했던 사람들은 자신을 설명하는 한 단어가 명확한 사람이었다. 혹은 그걸 ‘말’로서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은 ‘업’으로 모든 것을 증명했다. ‘하는 일’, ‘추구하는 가치관’, ‘닿고자 하는 방향’이 주머니 속 송곳처럼 뚜렷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를 설명하는 수식어가 아무리 바뀐다 한들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 느껴졌고, 이내 부러운 마음이 일었다. 회사를 다니던 시절에도 프리랜서가 된 이후에도 그것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에 자주 사로잡혔다. ‘설명’은 곧 ‘말하기’인데, ‘말하기’에 유독 서투르고 겁이 많았던 나는 이따금 나의 작업과 방향성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하는 일, 내가 쓰고 싶은 글의 방향을 명확하게 ‘말하지 못했다’.


<말가짐>을 다시 읽은 날. @류예지


그런데 채자영 공동 대표의 <말가짐>을 톺아보며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어쩌면,  내가 회사라는 조직에서 나름 성실하게 제 몫을 해냈음에도 과장에서 팀장으로 도약하지 못한 이유, 쓴 책이 세 권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유령 작가로 격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나의 업에 대해 ‘말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말하는 법’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말하는 ‘법’을 모르면서  말하기 위한 ‘노력’조차 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은 모습을 애써 들키지 않기 위해 ‘불안’과 ‘두려움’으로 손쉽게 도망갔던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그것을 ‘실패’라고 규정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언제나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다. 물론, 그 감정 속에 오래 파묻혀 있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실패라고 말한들 어떤가. 처음으로 주저함 없이 문서화된 형태로 실패를 ‘말함’으로써, 변화될 나를 받아들일 첫 번째 ‘문’을 열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내가 많은 실패를 경험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나는 별별 종류의 실패를 다 겪어 봤다. 지난 9년 동안 말하기를 해 왔으니 실패를 겪어 보지 않은 것이 이상할 테다. 열심히 말하고 있는데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무례한 사람은 물론이고 일부러 떠들며 방해하는 사람, 조는 사람, 관심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 아예 쳐다보지 않는 사람, 일부러 나를 당황시키려고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사람… 말하자면 끝이 없다. 하지만 나에게는 다음의 말하기가 있기에 나는 실패한 후에 그 말하기가 왜 실패했는지 스스로에게 끈질기게 묻곤 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 <말가짐> p.146-147 중에서



전문 프리젠터로 활동하는 동안, 유독 성공한 실적만이 회자되었을 채자영 대표에게도 이렇듯 수많은 실패가 남긴 상처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실패를 곱씹는 데 치중했던 나와는 달리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추고 치열하게 고민한 것이 나와의 차이점일 테지만. 어쩌면, 나는 나의 실패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다시 ‘말하기’를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의 이야기도 ‘좋은 브랜드’가 될 수 있다는 믿음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는 결국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와 동의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빛나는 이야기가 있다’라는 슬로건을 지닌 필로스토리. 자기다움을 찾아 세상에 전하는 필로스토리를 창업하면서 내가 얻은 가장 큰 혜택은 타인의 자기다움을 고민하는 것만큼이나 스스로의 나다움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나만의 타고난 고유성은 무엇일까,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을까, 나는 무엇을 좋아할까, 나는 어떤 순간을 사랑하는가. 누군가의 철학을 발견하기 위해 던지는 이 질문은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온다.

-‘우아함은 거절이다’, <말가짐> 184p 중에서


기록상점을 방문한 것은 지난 9월의 일이었다. 일차적으로는 필로스토리와 함께 기록상점에 입점해 있는 브랜드인 라이프컬러링의 브랜드 토크를 관람하기 위해서였지만, 근본적으로는 필로스토리가 협업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실제 ‘공간’인 기록상점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주택을 개조한 기록상점은 붉은 벽돌 외장재를 고스란히 남겨둔 채 연남동의 주택가 풍경에 자연스레 동화되어 있었다.  


건물 4층 라운지에서  두 시간 동안 알차게 진행된 브랜드 토크를 관람한 후,  2층 쇼룸에 한동안 머물렀다. ‘필로스토리’를 비롯해 입점 브랜드들의 디자인 상품인 툴킷이 아기자기하게 비치된 중앙 테이블,  작은 브랜드를 이끌어나가는 젊은 대표들이 출간한 책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서가를 둘러보았다. 1층부터 4층까지 뚜벅뚜벅 올라갔다가, 다시 4층에서 1층까지 총총총 내려오는 과정을 반복하며, 연트럴파크로 대변되는 연남동의 주요 대로변에서 한 블록 들어갔을 뿐인데도 외부의 소요가 거의 침범하지 않은 공간에서 원하는 무엇이든 ‘사유’를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품을 수 있었다.  고요한 공간에서 비롯된 차분한 무드마저 앞으로 기록상점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날 하나의 ‘고유한 이야기’가 되겠다는 생각도 함께.


기록상점을 다녀가기 전 이미 구매해서, 다녀간 후 찬찬히 완독 한 채자영 대표의 <말가짐> 속 필로스토리와 필로스토리를 이끌어가고 있는 채자영 공동 대표가 내건 고유한 정체성인 ‘스토리젠터’를 빌어 말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명확하게 확인했다. 이미 자신으로 충분히 살아낸 당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 저마다의 자리에서 버티고 살아낸 이야기야말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한 브랜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서가 한쪽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포트폴리오 중 일부. 매거진, 브로슈어, 가계부, 다이어리가 총망라되어 있다. @류예지


문득, 이번 글을 마무리할 시점에 와서야 첫 프레젠테이션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두 번째 기획사에서는 주로 제안서를 제출한 후 프레젠테이션 당일 페이지 터너 혹은 참관 자격으로 입찰 현장에 참여했지만, 세 번째 기획사에서는 제안서 마무리에 이어 프레젠테이션을 실제적으로 진행해야 할 순간이 드물게 찾아왔다. 메인 PM으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한 건은 공공기관의 사례집 제작과 대학교 메인 홍보 브로슈어 건이었는데, 당시 회사에서는 앞으로를 위해 경험 삼아 해보라며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것을 강권했다.  결과적으로 사례집 건은 수주하지 못했고 브로슈어 건은 수주 진행을 하게 되었다. 브로슈어는 제한 입찰이었기에 내부적으로 ‘된다’는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지만, 초지일관 꼿꼿한 태도로 응수하는 대학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2회에 걸쳐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며 ‘당연한 이유로 된다’는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 ‘당연하지 않은 이유로 되지 않을 수 있다’와 같은 의미일 수 있음을, 한편으로 유념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다행히 공식적인 대행사로 업체 선정이  되었고, 그 후 한 권의 브로슈어가 완성되기까지 2개월 넘게 홍보팀 담당자와 카피라이팅 워싱에서부터 브로슈어 아트워크에 대한 전 과정을 조율하며 보냈다. 막상 브로슈어가 인쇄된 날은 누적된 업무 피로로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다. 며칠이 흘러 책장에 꽂아둔 브로슈어를 정독하듯 훑을 때 나의 감정은 ‘뿌듯함’보다는 ‘아쉬움’에 가까웠지만, 그 감정은 또 다른 출간물 일정을 순차적으로 치러내는 와중에 휘발되듯 사라졌다. 그러한데도 결과적으로는 10년 가까이 기획사에서 해낸 수많은 작업은 기획자로 살며 체득한 흔치 않은 경험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오히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온 우리가 조금은 그 시선을 내려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길 바란다. 스스로 무엇이 중요한 지 알고 그것을 지켜낼 수 있다면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서도 그 선을 지키면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다운 언어를 통해 서로를 말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더욱 존중하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서로를 통해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변화하기를 바란다.

-‘나다움의 진짜 의미’, <말가짐> p. 214 중에서



돌이켜보면 그랬다. 평범한 기획자로 분투하며 살았던 개인의 경험, 작가이자 프리랜서 기획자가 된 후에는 성공보다는 실패의 서사가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누가 궁금해할까? 스스로 세운 엄격한 기준으로  자신을 검증하기에 바빠 ‘나만의 고유한 이야기’가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되고 있다는 믿음을 갖지 못했다.  아마, 나의 실패는 거기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 지점에서부터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써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 나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험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브랜드, 필로스토리의 궁극적인 존재 가치를 빌어 가슴속에서 가장 빛나는 ‘단어’와 심장을 가장 뛰게 하는 ‘문장’은 무엇인지 발견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그렇게 떠오르는 생각을 문장으로 ‘정돈’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말로 ‘전달’하겠다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가닿는’ 진실한 기회를 갖기 위해 나는 지금 세상 속으로 한발, 한발 나아가는 중이다.




Cover-image : 필로스토리 공식 홈페이지

- 공식 홈페이지 https://philostory.com/about

최신 근황

- 채널예스 : https://ch.yes24.com/Article/View/51206 

- 탑클래스 : http://topclass.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5048

- SIDE :  https://sideproject.co.kr/sidexstorysenter


이전 09화 “다정한 도구로 일상을 채워나가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