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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ete Jan 17. 2021

나의 사물들

난 너를 알고 싶어

아빠는 살아생전 화초를 무척 좋아하셨다. 돌아가신 지 올해로 20주년이 되는데, 돌아가신 직후 몇 년간은, 예민하고 날카롭고 무서웠던 아버지와 다정한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는 것에 대한 슬픔과 허허로움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도 변하고, 상황도 변할수록 아빠의 다른 모습이 떠올랐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데 산 자의 생각에 따라 고인의 이미지는 이렇게도 변형되고 저렇게도 변형된다.


아빠는 주말마다 베란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화초를 가꾸시고 어항을 관리하셨다. 어디선가 식물들을 사오셔서 분갈이를 하시거나 어항의 작은 물고기들에게 밥을 주시고 때로 사체를 건져내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곤 했었던 것 같다. 저런 애정을 자식한테 쏟아 부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아빠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셨지만 어떻게 사랑과 애정을 표현하는지는 전혀 배우지 못하셨다. 아빠가 태어나신 환경과 아빠의 부모님을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전쟁을 맞았고, 어릴 때 죽은 형제자매 말고도 6남매가 가난한 환경에서 척박하게 생존해나가면서 나이 드신 부모님에게서는 애틋한 정서적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그런 아빠는,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과 애정 어린 상호작용하는 것을 어려워한 대신, 화초나 물고기와 그런 상호작용을 하신 것 같다. 나도 강아지를 키우면서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를 강아지에게서 치유받는다고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무 생각이 없는 듯한 강아지는 내가 눈물을 흘리면 혓바닥으로 눈물을 닦아주고, 내가 가족과 다투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을 때에도 눈치 없이 안아달라고 쫓아다녀 내게서 기어이 사랑이라는 마음을 내게 만들고야 말았으니 말이다. 인간의 복잡한 일에 골몰하다가도 강아지가 방석에 지려놓은 오줌을 처리하고 있노라면 머리가 단순해졌다. 강아지는 그렇게, 자연과 가까워지게 하는 경험을 하게 도와주었다. 자연과 가까워지는 것은 훨씬 맑고, 훨씬 천진하고, 훨씬 단순해지는 경험이었다.


재작년 여름,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순식간에 모든 일을 내려놓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으면서도 하던 일을 계속 하던데, 나는 무조건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하는 줄 알았고, 사실 바쁜 걸 좋아하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된 김에 실컷 쉬어나보자, 생각했다. 아무도 내게 일을 많이 하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세워놓은 기준으로 늘 나를 닦달하는 면이 있었다. 늘 나 자신을 점검하고 검열했다. 이 정도는 해야 나중에 더 나이 들어 후회하지 않지 않을까.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 겨우 이 정도밖에 일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 아닐까. 하는 일은 완벽하게 해야 누구에게도 (나쁜) 말을 안 들어.


그런데 중병에 걸렸으니, 이제 쉬어도 내 내면의 감독관이 몰아치지 말아야 할 구실이 생긴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몸은 편치 않지만 내면은 쉬게 되었다. ‘지금은 건강을 위해 마음껏 쉬어줘야 해. 다른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어. 미래를 걱정하며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인생만 살지 않았는가. 하지만 미래가 아예 없을 수도 있어. 죽으면 그만인걸. 딱 오늘 하루 행복하게 살자.’


그렇게 해서 난 정말 편하게 쉬었다. 1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잡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일 하나만 했다. 그건 내가 순전히 즐기면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행복’이라는 감각을 배워갔다. 예전에도 여행을 갈 때나 아름다운 길을 걸을 때, 자연을 바라볼 때, 대화에서 특별한 이야기를 만날 때, 또는 책이나 영화에서 깊은 통찰을 길어 올릴 때 문득문득 충만감을 경험하긴 했지만, 이렇게 ‘지속적으로’ 일상 속에서 평안과 충만감을 경험해본 적은 없었다. 내 내면은 나 자신에 대해 몹시도 너그러워졌고, 그런 너그러워짐 속에서 충분한 시간을 만끽하다 보니 일상 속의 즐거움을 가꾸는 법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다 만난 것이 식물이었다. 엄마 친구분이 자신의 집에서 키우던 바이올렛의 일부를 옮겨 심어 꽃이 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 계기가 되었다. 가을인데도 바이올렛은 계속해서 꽃을 피워댔다. 특별히 대단한 것을 해주지 않는데도 방에서 수줍은 듯 고개를 떨구며 꽃을 피우는 바이올렛을 보며 날마다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는 식물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아침마다, 새로운 꽃봉오리가 맺히고, 핀 꽃은 더 커지고, 햇빛에 하얀 꽃잎이 반짝이는 것을 바라보면서, 다양한 식물 식구들을 들이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식물들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그냥 아는 것도 아니라 ‘속속들이’ 알고 싶어졌다. ‘안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 아닌가. 나는 그렇게 식물 하나하나와 ‘앎’의 관계를 맺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 원하는 환경도 다르고, 우리 집의 어떤 장소에 있느냐에 따라 성장속도도 달라지니 여러 가지로 신경 쓸 것이 많았는데, 그 신경을 쓰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서야, 그토록 피곤한 일주일을 보내고 나서 베란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화초를 가꾸시던 아빠가 생각났다. 엄마는, 방에서 입을 쑥 내밀고 분갈이에 집중하고 있는 나를 보시며 ‘이00(아빠 이름)이가 살아 돌아온 것 같다’며 기가 막히다는 듯 웃으셨다.


조르주 페렉은, 갈망하는 물건들을 통해 현대인이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는 행복에 대한 사유를 담아내어 <사물들>이라는 제목을 붙였다면, 나는 내 작은 공간 속 사물들(식물을 포함)과 나의 관계 맺음을 통해 그 사물들이 영혼을 갖게 되고 나의 영혼에도 생기가 돋아나는 과정을 담아내어 <나의 사물들>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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