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그리고 떳떳함에 관하여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할까?

by 김반장

영화 「밀양(secret sunshine)」에서 주인공 신애는 아들 준과 밀양으로 오고 있다. 밀양은 죽은 남편의 고향이다. 신애는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 곳에서 새출발을 해보려 한다. 피아노 학원을 열고 주민들과도 익숙해지던 어느 날 신애의 아들 준이가 유괴당하고, 얼마 후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고, 범인은 준이의 웅변학원 원장임이 밝혀지면서 갑자기 분위기 스릴러. 원장은 땅을 보러 다니는 신애가 돈이 많은 줄 알고 범행을 저질렀다 말한다. 자신의 상처를 허세로 둘렀던 신애의 작은 욕망이 타인의 악의를 불러들였던 것이다.

신은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준을 데려갔을까. 신애는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신애를 안타깝게 여긴 약국 주인이 신애에게 보이지 않는 것에 신의 뜻이 있다 말하지만, 신애는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러다 생각 없이 찾은 교회 부흥회에서 그 간의 마음을 토해내기라도 하듯 울음을 터뜨리고, 그녀는 보이지 않는 신의 손길을 느낀다. 신애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원수도 사랑하기로 마음먹는다. 주변의 만류에도 준을 죽인 원장을 용서하러 교도소에 간다. 그런데 원장의 낯빛이 심상치 않다. 평온해도 너무 평온하다. 신애가 그대를 용서하러 왔노라고 은혜를 베풀기도 전에 그는 하느님이 자신을 용서했노라고 말한다. 신애는 신에게 배신당했다. 그녀가 교회 집회에서 트로트를 틀고, 약국 장로를 유혹하는 것은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의 허락도 없이 멋대로 살인자를 용서해버린 신에 대한 복수이다.

이 영화를 보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용서란 무엇일까? 신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아버지가 살인자라는 이유로 동네 사람들에게 멸시 받는 원장의 딸이 미용사가 되어 신애를 조우했을 때,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신애는 미처 머리를 다 자르지 못한 채 뛰쳐나온다. 신이 용서해버린 죄인 대신 십자가를 짊어지고 사는 이들에게 무책임한 신은 제목처럼 비밀스러운 햇빛을 비출 뿐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나?




‘내가 용서한 적 없는 가해자를 신이 용서했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 영화에서는 신이라는 타자가 개입해서 용서의 질서를 흐린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고통이기도 하다. 내가 어렸을 적 나를 괴롭혔던 놈이 나이 들어서 더 잘 살고 있더라는 경험담들이 인터넷 곳곳에 탄식과 함께 쏟아지고 있다. 그 놈이 연예인이라면 탄식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대중은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 분노한 대중들이 법으로는 이룩할 수 없는 공정성에 대한 사명을 가지고 뜨겁게 복수를 감행하여 신이 외면한 정의를 끝내 쟁취하는 것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현대인들은 더 이상 세상이 공평하다고 믿지 않는다. 가해자마저도 용서한 세상에서 오히려 자신은 용서받지 못한 외로운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지독한 두려움이 ‘공정함’에 대한 병적인 집착과 뜨거운 분노를 낳는 것 같다.


공공의 대리분노. 피해자는 분명 많은 위안을 받을 것이다. 나 혼자만의 고통이 공공의 영역으로 옮겨가면서 내가 세상 속에서 타인의 관심을 받고 있는 존재라는 자존감을 느낄 것이다. 나의 목소리와 세상의 목소리가 일치한다는 합일감 덕분에 더 이상 상대방을 용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지금부터 패배자는 내가 아니라 너야.’

그렇다면 현대사회 들어서 정의와 공정이라는 사회적 공감대로 용서의 가치가 퇴색된 것일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용서를 두 가지 채널로 분류할 필요가 있다.

나를 용서하는 것과 타인을 용서하는 것.


□ 나를 용서하는 것에 대하여

용서라고 함은 선물처럼 주고받을 수 있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서, 상대방이 용서하지 않아도 나는 용서 받을 수도 있고 상대방이 용서해도 나는 용서 받지 못할 수도 있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했다고 해도 나는 그 사랑을 다 이해할 수도 온전히 받았다고도 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용서와 사랑은 대상을 향한 개인의 감정으로 마치 그 대상과 주고받는 듯한 개념이 덧씌워져있지만, 사실은 ‘내 안의’ 대상에게 느끼는 ‘내 안의’ 감정일 뿐이다. 용서와 사랑은 지극히 주관적인 내 안의 경험이다. 고로, 용서하는 것은 나를 용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앞서 말한 피해자는 나를 용서한 것이다. 내 안의 내가 어린 시절에 해결하지 못했던 부당하고 억울 한 감정을 지금 타인의 지지와 공감을 받음으로써 천천히 해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용서는 내 안의 부정적인 감정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나를 용서하면 내가 두려워했던 것들이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다. 나를 용서하면 피해자를 부적응자로 몰아가는 세간의 시선에도 스스로 주눅 들지 않는다. 나를 용서하면 가해자가 응당 받아야 할 사회적 벌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부조리한 온정주의에도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나를 용서하면 가해자를 용서하고 그가 과거를 잊고 잘 살아가기를 응원할 용기가 생길 수도 있다. 나를 용서하면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상처받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떳떳함이다.

우리가 만나는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잘 용서한다. 이런 사람들은 ‘내로남불’ 유형으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왜곡된 관점으로 자신을 사랑한다. 이것들은 떳떳함이 아니다. 떳떳함은 뻔뻔함과는 다르다. 떳떳함은 나의 주장과 공적 영역의 합리적인 만남이 이루어져야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논리와 이치에 맞지 않는 사정으로 내 마음 하나 편하자고 나를 용서해버리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그렇다고 비겁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더 가혹해서도 안 된다. 이 또한 강박증적 자기애와 다름없다. 자신을 과하게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자신에게 지나치게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자신을 용서하게 되면 비로소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 세계를 확장할 수 있게 된다. 마치 2005년 기네스북에 오른 로이스 깁슨처럼. 그녀는 성폭행 당한 고통스러운 경험을 시간이 지워주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를 성폭행 피해자들의 진술만으로 실제와 비슷한 성폭행범들의 몽타주를 그리는 일로 승화시켰다. 비록 자신을 성폭행한 사람은 잡지 못했지만 수많은 피해자들의 치유를 도왔다. 그녀가 기여한 사건은 2005년에 이미 1000건이 넘었다.


□ 타인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에 대하여

하지만 앞서 말한 피해자가 완전한 용서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바로 그가 타인, 즉 가해자를 이해하지는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피해자는 자신을 용서해야 비로소 타신을 이해할 여유가 생긴다. 만약 피해자가 자신의 고통에 매몰되어 상대방을 미워하는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은 의지가 없는 것이 라면 피해자에게도 어느 정도는 용서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 용서는 피해자의 권리이기에, 그 책임이 가해자를 위해 용서해야 할 책임이라고는 볼 수는 없다. 다만 자신이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선택을 포기한다는 측면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만약 타인을 용서하고 자유로워지고 싶은 의지가 있는 피해자라면, 가해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피해자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해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이해가 될 만큼의 정보를 제공받지 못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충분한 사과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과를 했을 때 모든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할까봐 두려워서 사과를 하지 않는 전략을 택했을 수도 있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납득할만한 충분한 변명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모든 문제를 피해자의 귀인으로 돌리는 전략을 택했을 수 있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당신을 아프게 해서 내가 고통스럽다.’는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자신이 고통스러워 보이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꼴이 될까봐 더 뻔뻔하게 더 당당하게 잘 사는 전략을 택했을 수 있다.

타인을 이해하고, 용서하기 위해서는 내가 타인을 용서했을 때 나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우리의 생존 DNA에 각인 된 것이라 어쩔 수 없다. 인간이란 혼자서 우뚝 살아갈 수는 없는 존재기에 생존하려면 많은 아군을 필요로 한다. 용서는 나를 해한 사람을 나의 아군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생존전략이다. 하지만 나에게 아군이 될 자격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 타인을 어떻게 나의 아군으로 받아들이겠는가? 나에게 용서를 빌지 않는다면 내가 그를 용서할 수도 없다.




영화 「밀양」에서 신애는 스스로도 용서하지 못했고, 타인도 용서하지 못했다. 단지 ‘용서의 상(image)’을 쫓았을 뿐이다. 신애가 은혜를 베풀고, 범죄자는 무릎 꿇고 은혜의 영광을 눈물로 받아들이는 성녀의 상(image)을 그렸을 것이다. 하지만 살인자는 신애의 '상'을 거부하고 이미 스스로를 용서해 버렸다. 내가 보기에 이는 꽤 뻔뻔한 용서의 축에 속한다. 살인자의 자기애에는 그가 주장하는 신의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자기 안의 비겁한 의지가 보일 뿐이다. 또한 살인자는 신애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다. 고립된 교도소에서 신애의 아군이 될 필요가 없었던 살인자는 그녀의 용서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평안하지만 가학적인 미소를 지으며 관객을 소름 돋게 하는 것이다. 살인자의 그로테스크한 평화로 신애는 타인을 용서할 기회를 잃었다.

대신, 용서하지 못한 자의 지옥에서 사는 신애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살인자의 딸이 흘린 눈물이다. 그녀가 꿋꿋이 감내한 세간의 비난과 폭력, 그녀가 기꺼이 짊어진 그 십자가로 신애는 서서히 자신을 용서하기 시작한다. 영화의 막바지에서 신애는 살인자의 딸이 다 자르지 못한 머리를 마저 자르기로 결심하고 비밀스러운 햇빛이 신애 집 마당에 드리운다.


용서는 아주 고차원적인 가치이다.

나를 용서하는 떳떳함과 타인을 이해할만한 정보와 상상력이 모두 갖추어져야 비로소 할 수 있는 어려운 일이다.

몇몇 사람들은 학교폭력에 법이 개입하면서 우려를 표한다. 학교폭력을 처리하는 절차가 복잡해지면서 아이들이 스스로 화해하고 타인을 용서하는 능력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마치 화해와 용서가 당사자들이 당연히 실현해야 하는 궁극의 가치라는 듯이. 어쩌면 이것은 우리 대한민국 사회가 오래도록 화해와 용서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부당함을 묵살하고 빠르게 성장해왔다는 방증이 아닐까. 하지만 화해와 용서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당사자만이 어렵게 결심할 수 있는 당사자 고유의 영역이다. 나대신 다른 여자가 내 남편과 대신 살아줄 수 없듯, 화해와 용서도 나대신 누군가가 대신 해 줄 수도 없고 그것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누군가가 나에게 화해와 용서를 강요한다면, 그것은 ‘듣기 싫으니 이제 그만 닥쳐줄래?’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므로 용서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기대에 맞추지 못했다는 불안감으로, 내가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어설픈 선량함으로, 자기가 피해를 정당하게 주장함으로써 가해자가 받을 처벌과 그에 따른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마음에, 서둘러 용서하는 ‘척’해버린다면 그것은 나를 용서할 기회와 타인을 이해할 기회를 둘 다 잃어버리는 것이다.


세상의 시선이 두려운가? 그러면 용서하면 안된다. 세상이 당신의 주장을 무시하는가? 그러면 더더욱 용서하면 안 된다. 상대방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더 뻔뻔하게 행동하는가? 그러면 절대 용서하면 안 된다.


먹잇감의 냄새를 지우고 강해져야 한다.

강한 자는 나와 상대를 용서하기 위해 싸우되, 타인을 가해하지는 않는다. 비루한 복수를 하려고 애쓰지도 않고, 남루한 피해의식으로 엄한 사람에게 화를 풀지도 않는다. 논리와 꺾이지 않는 집념으로 정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이 길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진정한 용서를 위해 싸우는 과정은 나를 위한 길이기도 하지만, 상대방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떳떳하지 못한 자는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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