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그러던데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전에도 시끄러웠던 적 있다며. 사람들이 너만 탓하더라고.”
학연과 지연 그리고 가족의 연까지 조직 내에 가득했던 여직원들의 입장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반면 우울증으로 휴직을 한 나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제대로 정신도 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조사에 응해야했고, 그때마다 조직의 차가운 시선을 맞아야 했기에 나의 마음은 만신창이였다.
사람들은 나를 걱정한답시고 열심히 소문을 퍼다 날랐다. 답답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처음 조사를 받으며 조사자에게 2차 피해가 심각하니 이를 도와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조사자가 한 말은 ‘지금 조사하면 소문이 더 크게 퍼진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애초에 조사할 마음이 없었다. 내 존재가 귀찮고 거슬릴 뿐이었다.
가족들도 비상이 걸렸다. 부모님에게는 내가 힘들게 들어간 직장이 동네 자랑이었다. 내가 가난한 프리랜서로 살았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물으면 엄마의 변명이 길었다.
“학원 강산데.. 진짜 강사는 아니고, 공부하느라고 강사 하는 거라서, 강사는 아니야.”
학원 강사는 훌륭한 직업이다. 나는 학원 강사가 얼마나 힘들고 보람찬 일인지 잘 알고 있다. 더더구나 성공한 학원 강사라면 부와 명예도 다 거머쥘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평생 내가 국가 원수와 함께 전 세계를 다니며 통역을 하고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꿈을 꾸셨기 때문에 가난한 프리랜서였던 내가 탐탁치 않았을 것이다. 그 가난한 시간을 지나 그나마 내가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갔으니, 부모님의 걱정이 한 줌 덜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물으면 엄마는 한 단어로 대답을 짧게 할 만큼은 쿨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직장의 변두리로 쫓겨나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부모님은 내가 찾아뵐 때마다, 이제는 그만 둔 것 아닌가 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도 이제 나이가 적지 않고, 부모님도 회갑을 앞두고 있었지만 마음이 복잡한 건 어쩔 수가 없으신 것 같았다. 그 애들을 이해해 보면 어떻겠냐는 조심스러운 제안을 해보기도 하고, 뻔뻔하게 살면 된다고 뻔뻔한 척 웃어 보이기도 하고, 급기야는 ‘아빠 회사 생활 할 때는 열심히 해서 성과만 나오면 버틸 만 했는데.. 네가 있는 곳이랑은 다른 건데.. 내가 그걸 모르고 열심히만 하라고 했다.’며 미안한 내색을 비치기도 했다.
내가 죄인 같았다. 내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나 싶었다. 차라리 내가 걔들을 한 대라도 쥐어박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내 괴롭힘의 피해자가 되는 것보다 폭행 가해자가 되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한 일일 것 같았다.
내가 폭행 가해자가 되면,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에게 ‘같은 동료인데 합의 해줘라.’며 나에게 온정을 베풀 것 같았다. 지금 나에게 하는 것처럼.
지금은 문제 삼는 내가 문제의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들이 승진 시험을 치루기 위해 두 달간 나에게 업무를 미뤘던 것도, 상관의 정당한 지시를 받은 일을 방해한 것도, 지속적으로 음해하고 집단적으로 나를 몰아세운 것도.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다, 내가 왜 부서장에게 이 일을 알렸는지에 더 관심이 많았다. 문제가 있어도 문제를 알리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사람들의 인식은 안락함의 대가로 우리가 짊어져야 할 침묵의 서약 같은 것이었다.
나는 점점 지쳐갔다. 분노도 힘이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내가 포기하면 이 모든 것은 이대로 멈추고, 그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아갈 것이었다.
조직에게 외면당하고 외부기관을 찾아다니던 어느 날, 서울과 부산을 왕복하기를 몇 번째, 그 날도 상담원에게 친절한 냉대를 받고 회의감에 젖어 부산으로 내려오던 차 안에서 어둑한 밤이 노을빛을 거둬가는 하늘이 보였다. 200장의 서류들이 뒷 좌석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었다. 처음에는 13장이었는데 점점 늘어나 50장이 넘었다가, 어느 새 200장 정도가 되어 있었다. 처절한 마음으로 적어갔던 글들이지만, 매 번 난색을 표하며 받아드는 기관의 담당자들은 이 글들이 그저 무겁고 산만하게만 읽혔을 것이다. 갑자기 20년 전의 내 모습이 기억났다. 분명 처음이 아닐 첫 수치심의 기억으로 초등학교 교실에서 ‘청소년 유해매체’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
어렸을 적 나는 친구들 보다 키는 한 뼘 더 크고 몸무게도 몇 키로는 더 나가는 우람한 태권소녀였다. 나는 꽤 의협심이 강한 아이였다. 장애가 있는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혼내주고, 멸시받는 아이들과 친구가 되기도 했다. 그때의 내가 착한 아이이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는 점은 인정한다. 초등학생 다운 유치한 이유로 소외당하는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도 그들을 친구라고 여기기보다는 나의 선함을 증명하는 도구라고 여기기도 했다는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 할 것 같다.
다시 토론을 했던 그 기억으로 돌아가서, 반에서 인기 있는 아이들은 말을 잘 했다. 당당한 미소를 머금고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음란물은 아주 나쁜 것이며, 절대 아이들의 손이 닿을 수 없도록 어른들이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나도 그에 동의 했던 것 같다. 다만 아이들의 논의가 음란물에만 집중되고 있는 것 같아 손을 들고 내 의견을 말했다. 유해매체에 대한 정의부터 정확히 하고 토론을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음란물 뿐만아니라 잔인한 칼부림이나 마약 복용, 각종 범죄를 묘사한 영화처럼 청소년들의 정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매체 전반에 대한 논의로 확장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자 한 아이가 보기 좋게 한 쪽 입꼬리만 가지고 웃으며, “지금 음란물을 모른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죠?”라고 말했다. 갑자기 웬 순진한 척이냐는 것이다. 그 순간 반 아이들이 모두 킬킬거리고 웃었다. 나는 전혀 웃기지 않았다. 얼굴이 화끈해지고 표정관리를 할 수 없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말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게 무려 20년 전의 일이었다. 학원 강사로 7년 밥을 벌어 먹었고, 이해가 상반되는 여러 사람 앞에서 강의를 하고 중재하는 업무를 맡고 있는 지금 같으면 달랐을 것이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했을 것이다. 가슴이 쿵쾅거려도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시당하지 않도록 용기를 냈을 것이다.
사람은 늘 지나간 일을 안타까워한다. 우리 부모님은 아직도 공설운동장 앞에 지어진 20층짜리 아파트를 지나갈 때면, ‘내가 저거를 왜 팔았을꼬. 5000만원 밖에 못 받았는데..’하고 후회하신다. 5층짜리 아파트였을 때 그 아파트를 5000만원에 팔지 않았다면, 지금은 5억짜리 아파트 한 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나도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지나간 것을 후회한다. 나는 20년 전 타인의 말에 쉽게 주눅 들었던 것을 후회했다.
20년 후 나는 지금의 일을 어떻게 기억할까. 사람들이 바라던 대로 모든 일을 묻어버리고 넘어가지 않았던 것을 후회할까? 지금이라도 포기한다면, 이것은 어떻게 기억할까? 포기해서 다행이라고 기억할까? 20년 전 얼굴이 달아올라 일언반구 하지 못했던 나처럼, 포기해버린 것이 바보 같다고 기억할까?
새벽부터 서울로 달려왔다가 그날 밤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사는게 참 고되다고 느꼈다. 내가 조금 더 가벼운 사람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람들의 견제를 받지 않는 실없는 사람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랜만에 내가 내가 아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의미 없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에게는 맥주 한 모금 말고는 달리 특별할 것 없는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한강을 따라 줄지어 달리는 차의 후미등을 바라보며 먼 길을 떠나는 지루한 하루가 절름거리며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