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휴식

상처받은 나를 돌보는 과정

by 김반장

휴직은 나의 패배선언이었다.

드라마 같은 상큼한 직장생활을 바란 것도 아니었는데.. 내가 바라지 못할 것을 욕심낸 적도 없었는데.. 전장에 나서기도 전에 백기를 펄럭이며 항복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수치심에 시달렸다. 나의 분노는 갈 곳을 잃고 헤맸다. 억울하긴 한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의 부지런한 우울은 내가 살아있는 한 모든 시간을 꽉꽉 채워서 나를 괴롭혔다.

나는 먼저 나를 돌보아야 했다.


평범한 대한민국 사람들이라면 다들 그렇겠지만 나 또한 살면서 나를 돌보아 본 적이 없었다. 그 시절에 주어진 과제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치유할 수 없는 욕망에 시달렸다. 젊음의 가능성을 낭비하는 대가로 먹구름 낀 듯 애매한 현실 속에서 불안에 시달렸다. 아무도 강요한 적 없는 것들에 시달려 나는 늘 이루는 것 없이 분주했다. 나를 돌보는 것도 연습이 필요했다. 변화는 한 번에 손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 전문가의 도움 받기 (상담, 병원)

제대로 된 심리 상담을 받기 전에는 심리 상담을 비싼 고해성사 정도로 여긴 적도 있다. 상담은 내담자의 복잡한 심정을 받아주는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나의 무지함에서 비롯된 오해였다.


나의 심리 상담 선생님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나의 불안함을 빨리 알아차리도록 도와주는 일이었다. 나의 불안 수준이 높아지면 어떤 신체반응을 보이는지 스스로 되짚게 하셨고, 그 신체 반응을 느꼈을 때 잠시 시간을 내어 신체반응을 평소처럼 돌려놓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알려 주셨다.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피하고 싶은 마음, 나의 솔직한 감정을 무시하지 않고 알아차리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것도 알려 주셨다. 내가 과한 책임감에 짓눌려 있을 때는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의 시각에서 벗어나 나에게 해로운지 아닌지를 고민하도록 해주셨고, 쓸데없이 나에게 해로운 자책을 그만두고 세상에서 가장 자비로운 사람이 나에게 할 법한 말을 스스로에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나를 돌보는 방법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으셨다. 나의 감각을 쓰는 일, 설거지를 하고 햇빛을 느끼며 걷는 일 등을 추천하셨다. 생각지도 못하게 강아지 크림이가 우리 집에 왔을 때는 크림이가 나에게 ‘치료견’역할을 해 줄 것이라며 나를 응원해 주셨다. 심리 상담실은 단순히 나의 걱정을 맡겨두는 곳이 아니었다. 나에게 일어난 일과 나의 감정의 상관관계를 파악하고, 내 생각의 습관과 반복적인 반응을 알아차리고, 앞으로의 과제에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었다.


병원에서는 또 병원만의 역할이 있었다. 병원에서는 먼저 나의 성향과 그로 인해 촉발될 수 있는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기 위해서 심리검사를 실시했다. 나를 오래도록 지켜보며 진행하는 종단적 검사가 아니라 짧은 기간 동안의 내 상태를 살피는 횡단적 검사였기 때문에 이 또한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어느 정도 나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검사 결과, 나는 사회과학적 해석능력이나 분석능력은 뛰어났지만 전체적인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데는 조금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성향의 내가 태세 전환이 빠르고 공격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피드백을 하니 멘붕에 빠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의사선생님은 나의 어떤 부분이 갈등을 촉발하게 한 것인지 탐색하셨고 조금은 ‘말랑말랑’하게 반응하라고 말씀하셨다. 나의 스키마(마음의 안경)를 조금 더 유연하게 만들라는 조언이었다. 조언과 함께 몸과 마음을 이완시킬 수 있는 약도 처방해 주셨다. 나는 가끔 의사선생님이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을 나만의 문제로 바라보시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서운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금이 옆에 있으면 금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신경 쓰이잖아요? 그럼 금이 사람들을 자극하는 거죠.”


이 말을 들으니 내가 금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동안의 서운함이 모두 씻겨가고, 내가 금으로서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적극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나의 패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 책 읽기

칠레 작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실존인물인 파블로 네루다와 허구의 인물 이슬라 네그라의 우편배달부의 우정을 그린 소설이다. 주인공 마리오는 칠레의 가장 사랑받는 시인이자 정치인 네루다에게 편지를 배달하면서 ‘메타포(은유법)’를 배운다. 아직 어린 그의 세상에서 메타포는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문이었다. 메타포를 알고 나서 그는 사랑에 빠졌고, 시에 빠졌고, 글을 삼키지 않고 음미하는 법을 익혔다. 1973년 자본주의를 주장하는 우파 군부 세력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나고 마리오가 살던 이슬라 네그라도 군인들에게 점령당하자, 죽어가던 네루다에게 마지막 우편물을 전하려고 우체국에 들른 마리오는 군인을 마주친다.

“엉, 우체부 모자를 썼네?"
마리오는 머리카락을 확실히 덮었는지 확인하듯 몇 초 동안 모자를 매만졌다. 그리고 냉소적으로 모자를 푹 눌러 썼다.
"앞으로 머리는 모자나 이고 가는 데 써야죠."
군인은 입술에 침을 바르고 새 담배를 물었다가 잠시 떼어 누런 필터 조각을 뱉어냈다. 그리고 마리오를 외면하고 군화를 빤히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말할 놈, 쥐 죽은 듯 지내라고."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민음사 p146-147

군인은 마리오의 생동감 넘치는 메타포가 침묵하기를 강요했다. 메타포는 쿠데타 세력에게 위협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생동하는 것은 통제하기가 힘들다. 세력이 세상을 통제하려면 인간 고유의 영혼이 드러나는 살아있는 것들을 모두 말살시켜야 한다. 그것이 언어이고, 문화이다. 김구 선생이 그러지 않았던가. '오직 한 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고. 문화를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나는 나의 문화를 잃었었다. 자발적으로 세상의 통제를 당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취업준비를 하고 직장에 들어가서 까지 나의 영혼은 오로지 세상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에만 귀 기울였다. 세상이 원하면 언제든 순응하고자 하는 태세였다. 그것이 똥인지 된장인지도 알지 못한 채 어렸을 적 배웠던 순진한 도덕은 고이 접어두고 세상의 논리를 익히는 데만 온 정신을 쏟았다. 침묵은 미덕으로, 얄팍한 정치질은 모범으로, 우물 안의 규칙을 익혔었다.

이제 나는 내 안의 새로운 문화를 구축해야 했다. 지난 몇 년 간 나의 사고를 구성했던 직장 적응적 언어를 대신해서 나를 정의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찾아야 했다. 마치 마리오가 메타포를 배워 사랑을 쟁취하는 법과 영혼을 잃지 않는 법을 찾아냈듯, 나도 나만의 언어를 찾아 나를 사랑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가가 난생 처음 ‘엄마’를 배우듯, 나를 지켜줄 새로운 언어를 열성적으로 습득했다.

책을 읽는 것은 나에게 작은 성취감을 선사하기도 했다.

이런 작은 경험들이 반복적인 비난에 상처 입었던 나의 자존감이 기지개를 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책을 읽고 깨닫는 것들이 늘어갈수록 내 안의 무기도 쌓여갔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책 속에는 넓은 세상이 있었다. 단지 지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좁디좁은 대한민국 중에서도 좁디좁은 사무실에서 통용되던 그들만의 논리가 세계 각 국의 문학과 통찰을 만나면 매우 하찮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들과 나의 하찮은 욕망이 얼기설기 얽혀 만들어낸 비상식적인 사건이 만화경으로 보는 세상처럼 작고 가벼워 보였다.


또한 책을 읽는 것은 의사선생님이 조언한 대로 ‘말랑말랑’한 스키마를 갖도록 도와줬다.

'아파도 아프다 하지 못하면(최기홍)'이라는 책에서는 스키마(schema)를 '마음이 쓰는 안경'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다양한 상황과 캐릭터를 이해하게 되었고 나의 딱딱한 안경을 고쳐 쓰는 연습을 했다. 더 나아가 일상에 치여 외면하고 살았던 문제들을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인생의 가벼움과 무거움이 무엇인지, 진정 삶의 한 가운데에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인간으로서 실격 당한 삶은 무엇이고 벌레가 되어버린 삶이란 어떤 것인지, 인간의 삶이 왜 가치가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러한 고민들은 인생의 방향성을 견고하게 잡아주었고, 예전보다 더 큰 시각과 유연한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우울한 생각은 그 자체로 나를 해치지 못했다. 하지만 한 번 그 생각에 빠지기 시작하면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파괴의 나락으로 유혹할 수도 있었다. 나는 책으로 쌓은 내면의 힘으로 우울한 생각들과 싸워나갔다. 나에게 나를 돌보는 일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치열한 전장이었다.



□ 사람들의 따뜻한 응원을 받기

상처받은 영혼은 사람을 피한다. 나도 한 동안은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만난다 해도 감히 나의 억울함을 토로하지 못했다. 그 어떤 말을 해도 나에게 진실일 수 없었다. 그만큼 내 마음이 참혹했다.


하지만 이런 나를 곁에서 지켜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나의 남편이었다. 나의 남편은 내가 직장에서 무너지고 패배를 인정하는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나를 책망한 적이 없다. 내가 그들의 논리를 받아들여 스스로를 괴롭힐 때는 불같이 화를 내며 나를 현실 세계로 끌어 들였다. 주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내가 처한 상황을 알려서 도움을 구했다. 내가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도와줬다. 내 남편은 단 한 번도 나를 부끄러워한 적이 없다. 내 남편은 단 한 번도 내가 참기를 바란 적이 없다. 내 남편은 단 한 번도 내 손을 놓은 적이 없다. 나는 남편의 손을 잡고 내 평생 한 적 없는 일을 하나씩 해냈다. 그것은 아주 외로운 싸움이었다.


남편의 조언으로 만난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도 나와는 조금 다르지만 새로운 도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필이면 나도 그 친구도, 그 친구의 동생도 일을 쉬게 되어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다시 소꿉놀이를 하는 아이로 돌아간 듯 우리는 순수하게 함께하는 시간을 즐거워했다. 정이 많고 사랑스러운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우울한 기분을 벗어날 수 있도록 많은 것을 선물해 주었다. 타인은 나의 거울이라던가. 그들을 통해 나는 내가 그렇게 형편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처음에는 친구의 작은 반응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관계로부터 도망갈 생각을 했었는데, 점점 그런 생각의 빈도도 줄어들었다. 친구들의 순수한 사랑과 응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너무 가깝지 않은 사람들이 나에게 큰 힘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책을 조금 더 깊게 읽고 싶은 욕심으로 구청의 고전문학 강의를 등록했다. 하지만 그 강의는 내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선생님의 짧은 강의 후 선생님이 준비한 삶에 대한 질문들로 1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사람들은 모두 당혹스러워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첫 날, 나는 나의 이야기를 꺼냈다. 최근에 나의 모든 신념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모든 것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말만으로도 내 목소리는 떨렸고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사실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말하지 않고는 다른 어떤 것도 이야기 할 수 없었다. 내가 직장에서 겪은 일은, 그때만큼은 내 마음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 하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후 한 분이 내 눈을 보며 말씀하셨다.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나의 터질 것 같은 불안이 주책없이 변명을 해댔다. 내 몸에 각인된 불안반응이었다. 나를 용서하는 것이 잘 안 된다는 하소연이었다. 그 말을 하면서 나는 내가 지금 투머치토커라는 것을 인지했다.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했다는 후회가 엄습했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탓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6명의 정예 멤버가 남았다. 우리는 첫 날부터 꾸준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각자의 삶을 응원했다. 이제 강의는 끝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독서모임을 하고 있다. 이제는 서로에 대해서 제법 많이 알게 되었고, 각자의 일상을 응원하는 돈독함도 갖추게 되었다. 나는 이 모임이 책을 읽고 지식을 쌓는 모임이 아닌 독서치료모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책으로 삶을 엿보고, 질문으로 나를 만나는 시간을 다 같이 나누면서 우리는 스스로를 치유했고 함께 성장했다.


우울할 때 다른 사람의 진심어린 응원을 받는 것은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다. 세상에는 의외로 타인의 고통으로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려고 하는 사람이 많다. 자신에게는 절대 그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 그 사람이 그런 일을 당할 만하기에 당했다는 생각은 절대 숨길 수 없다.

한 번은 나의 직장 동료 하나가 나에게 "내가 여직원들에게 너희들이 한 짓은 너를 왕따시킨거라고 내가 경고했어."고 말했다. 그때는 고마움을 느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것이 자신의 경고로 나의 위기를 넘기게 해주었다는 시혜적인 의식, 그 아래에는 자신의 경고가 나를 구할 수 있었다는 우월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편인듯 내편이 아닌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먼 직장 동료 하나가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왜? 그 사람은 성격 좋잖아?”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따뜻한 타인을 찾아 나서야 하는 이유는 오로지 사랑만이 사람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일기를 쓰며 자신을 탐색해도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신 안에만 침잠해서 외부의 자극을 차단하는 것으로는 성장할 수 없다.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과제는 타인을 얼마나 충실히 사랑하고 베풀었는가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이 휘두르는 판단의 칼날을 맞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타인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 약한 존재 보살피기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자는 자신의 연인 토마시로부터 자신의 개별성을 찾으려는 인물이다. 그녀는 어렸을 적 어머니에게 무시당한 자신의 젊음과 육체의 개별성을 토마시의 사랑으로 보상받고 싶어 하지만, 매일 머리에 다른 여자의 성기 냄새를 풍기는 그에게 자신만의 특별함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테레자는 토마시가 똑같은 모습으로 행진하는 육체들 사이에 자신을 세워놓고 한 명씩 총살하는 꿈을 꿨다.

소설 후반부에서 테레자는 자신이 키우는 개 카레닌을 보며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깨닫는다. 테레자는 관계의 역학에 따라 처신해야 하는 인간세상의 허울을 생각하며 ‘인간의 참된 선의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순수하고 자유롭게 베풀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테레자는 카레닌에게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를 자신의 모습에 따라 바꾸려 들지 않았다.’는 것과 ‘개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자발적 사랑이다.’는 것에 자신이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던 대상은 카레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테레자는 자신을 따라오는 바람에 외과의사라는 직업도, 안락함도 잃고 유리창 닦이 노동자로 살아가는 토마시에게 용서를 구한다.


소설 속 테레자처럼 강아지를 돌보면 불안함 없이 평온하고 조건 없이 순수한 사랑을 배우게 된다. 평온하고 순수한 사랑은 마음을 치유해 준다.

나는 강아지 크림이와 함께 하면서 내가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크림이를 돌보다보니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들이 나의 우울을 녹이는 것 같았다. 매일 밥 주는 것, 응가를 치우는 것, 이틀에 한 번 산책을 시키는 것, 빗질 하는 것, 목욕 시키는 것. 이러한 일들이 단지 내 시간을 채우기 때문은 아니었다. 크림이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일들을 하다보면 세상살이 별달리 중요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나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기만 하는 순진무구한 존재의 권태 없는 사랑을 받다 보면 내가 하고 있는 이 사소한 일들의 존재감이 지구를 덮을 만큼 크게 느껴졌던 것 같다.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책에서 흥미로운 사례를 본 적 있다. 요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우울한 노인들에게 강아지나 고양이, 식물을 돌보는 역할을 주면 그저 약물과 보호만 제공하는 요양원보다 삶의 질도 훨씬 높아지고, 평균 생존기간도 훨씬 길어진다는 것이다. 약한 존재를 돌본다는 것은 나를 돌보는 것과 같은 것인가 보다. 그런 의미에서 봉사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감각을 쓰는 일

기원전 4세기 중국에서부터 널리 알려진 작자 미상의「내업 內業」에서는 만물의 정기가 가슴에 갈무리되면 성인이라 부르고, 천지 사이에 떠다니면 귀신이라고 부른다 했다. 우울은 나의 기운이 통제 불능인 경주마처럼 날뛰어 도저히 나의 가슴으로 붙들 수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우울에 빠지면 마치 귀신처럼 갈무리 되지 않는 생각들이 내 주변을 떠다니는 기분이 드는데, 이럴 때는 날아다니는 우울한 기운을 감각으로 모아야 한다.


바디 스캐닝(Body Scanning)이라는 명상법이 있다.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차례차례 감각에 집중하는 것이다. 감각에 집중하는 일은 현재 나의 존재에 대한 강렬한 인식이다. 이는 시끄러운 생각을 지우고 명료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간단한 설거지나, 산책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단순한 일에 집중하면 우울은 어느새 잠잠해 진다.

아주 단순한 아르바이트를 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전단지를 붙이거나, 지나가는 행인을 세는 일도 좋다. 어떤 일이든 복잡한 과제만 아니라면 스트레스 없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것을 보고,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나의 촉각에 집중할 수 있는 일은 우울한 나에게 이로운 일이다.



□ 우울 일기 쓰기

나는 평소에 일기를 쓰지 않는다. 슬플 때만 펜을 잡는다. 글을 쓰는 일은 나의 영혼을 담는 일이다. 인간은 슬플 때 유독 영혼의 종이 울리는 것 같다.

우울할 때는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찬 흡연실에 있는 것처럼 정신이 혼미하다. 뇌에서는 어떤 언어가 아닌 소리가 들려온다. 웅웅, 아아, 때로는 짐승의 포효 같기도 한 소리가 난다. 일기를 쓰면 이러한 소리가 인간의 언어로 치환된다. 내가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우울한지, 그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때로는 글로 쓰던 것들을 마인드맵으로 다시 정리하기도 한다. 그러면 지금의 우울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있다. 우울 일기를 쓰다보면 우울이 유행 지난 재고가 쌓여 도저히 못 참겠다고 나를 찾아온 묵은 감정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 마음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찾아서 재고품을 정리하고 마음의 공간을 비우면 어느새 우울은 고요히 잠든다.


물론 우울 일기를 쓴다고 해서 우울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를 알지 못하면 그 시작조차 할 수도 없다. 나를 알지 못하면 그 어떤 희망도 없다. 희망이 없는 곳은 지옥이다. 먼저 나를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우울 일기를 써야 한다.


우울은 '내 마음의 보석함'이다.

우울 일기를 통해 그것을 열어 보면 모든 것은 변한다. 등 떠밀리듯 우울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절망감이 사그라들 것이고, 그 다음에는 두려워하던 것들이 아주 작아 보이기 시작할 것이고, 내 삶이 괜찮아지고 있다는 희망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더 깊이 나 자신과 세상을 알게 됐다는 합일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정말 경이로운 경험이다.



나를 돌보는 시간을 가지다보면 가끔은 내가 아주 괜찮아진 것 같기도 하다.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였는데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먼지 털듯 툴툴 털어내고 별 일 없었던 듯 걸어가고 싶은 욕심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겪은 모든 일들이 없었던 일이었기를 나는 간절히 바랐다.


어떤 이는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없었던 일처럼 잊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신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 있으니 아무런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다. 어쩌면 그 말처럼 나는 있었던 일을 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더 이상 그 사람들을 보지 않게 되면 그 사람들이 했던 말들이 기억속에서 희미해지고 그들을 모두 용서한 것 같은 기분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어서는 안된다. 이미 충분하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머리로는 기억하지 못해도 마음은 기억한다. 마음은, 나도 모르게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다. 나도 모르게 타인이 예전의 그 사람들처럼 자신을 바라볼까봐 변명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나도 모르게 타인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것을 주며 사랑을 구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며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할 수도 있다. 내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이것은 떳떳함의 문제다.


내 스스로 떳떳하고

진정으로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 때,

그 때 고통은 제 발로 떠나가는 것이다.


망각은 용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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