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그들을 이해해 보려고도 했을 것이다. 좋은 마음으로 직장생활을 해나가겠다는 결심도 수차례 했을 것이다. 그들과 동화되지 못한 자신을 탓해 보기도 하고, 심리 치료서나 자기 계발서를 뒤적이며 난세 속 구도자를 흉내내기도 했을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 조언을 구해 보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속이 시원하지 않다. 신랄하게 욕을 해주는 사람, 화끈하게 그만두라고 말해주는 사람, 나를 조직에 끼워 맞추기 위해 요리조리 깎아내리는 사람, 각자의 방식으로 당신을 위로하지만 그 어떤 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외딴섬에 혼자 고립된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고립감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힘든 일을 겪다 보면 내가 믿었던 사람들의 알고 싶지 않은 면면까지 보게 된다. 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나에게 일러바치며 재밌어하는 사람도 있고, '쟤에게 무슨 문제가 있겠지'라고 끊임없이 의심하며 그 의심을 확인하려는 사람도 있고, 나를 위로하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분명 선량하다고 믿을 만한 사람인데도 그렇다. 그것이 본성의 문제인지, 상황의 문제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부터 그들을 멀리 해야 한다는 것만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들이 나에게 어떤 조언을 했든 그것은 다 무시해도 좋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해온 삶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생각은 하지 못한다. 그들이 한 말은 모두 예외 없이 그들이 타고나 자란 환경과 무수한 선택들에 갇힌 시야를 증명해줄 뿐이다. 그 누구의 말도 정답일 수 없다.
당신은 조직생활을 하며 수없이 들었던 말,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는 말이 생각날 수도 있다. 내가 이 곳을 떠난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 그들로부터 멀어지면 괜찮아질까? 그들의 행동이 은밀하기만 했다면, 그들과 멀어지는 것 만으로 괜찮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떠나는 순간 그들은 다른 가면을 쓸 것이고 나도 어느 정도는 조직의 기대에 부응하는 가면으로 그들을 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이미 이를 드러냈다면? 공공연히 나를 비난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악의적 소문을 내고, 상사까지도 자신들의 뜻에 동조시켰다면 내가 떠나는 것 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소문은 이름표를 달고 다니지 않는다. 폐쇄적인 조직에서는 누구의 입에서 나온지도 모를 말들이 사람을 침몰시키기도 한다. 당신이 조직을 완전히 나온다면 어떨까? 그렇다 하더라도 상황이 나아질 지는 미지수다. 당신은 '조직생활'이나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한 상태에서 영원히 불쌍한 자신만 나무랄지도 모른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한낱 중이 바꿀 수 없는 '절', 그 '절'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무실 분위기를 쥐락펴락하는 그들이 '절'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이 나의 성과를 가로막기 위해 선동전을 펼치는 것이 그 잘난 '절'이 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착각하지 말자. 그들도 '절'은 아니다. 그 '절'에 화합하지는 못하지만 동화되기를 원하는 소인배로 가득 차 있을 뿐, 다수라 해서 '절'은 아니다. '절'은 나를 고용한 회사 혹은 국가다. 내가 '회사'의 이익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는가? 내가 '정의로운 국가관'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는가? 내가 '법'이나 '사칙', '규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는가? 내가 그들의 업무를 침해하거나 가로채는 행동, 더 나아가 지위나 관계의 우위를 이용해 그들에게 고통을 준 적이 있는가? 그것이 '절'의 고민이다. 행여나 당신이 절을 떠난다면, 그것은 '절'에 희망이 없다는 판단이 드는 그때 '절'을 버리고 당당하게 떠나야 하는 것이다. '절'인 척 하는 그들을 피해 도망치듯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로써 당신이 부당함을 알리기로 결심했다면, 꼭 기억해야 한다.
부당함을 알리는 것은 가해가 아니다.
당신이 가려고 하는 길은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 혹은 누군가는 갔지만 알려지지 않았던 길이다. 그렇기에 '억울하다'는 감정과 '부당하다'는 인식에서 '부당함을 알리겠다'는 용기를 내기까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이후 가야 할 길도 만만하지는 않다. '실행'의 단계에서는 더 큰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다.
이제부터 '실행'의 단계에서 가장 어려운 '글쓰기'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가장 먼저 글을 쓰며 마주치는 어려움은 나의 경험을 활자로 치환할 때의 심리적 불편함이다. 겪은 일을 기억나는 대로 복기하는 것과 따돌림, 업무 과중이나 업무 배제, 업무 방해, 악의적 소문, 조직적 음해, 위력에 의한 성희롱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부당함'을 주장하려면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공론장으로 끌어와야 한다. 이때 그들의 행동과 나의 피해를 새롭게 정의하는 작업이 불가결하다. 공적 차원의 언어는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생소하고 되레 겁이 난다. 그래서 어느 연예인의 말처럼 '술을 마시긴 했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웃픈 변명을 하게 된다. 가정폭력을 당한 어느 여인이 '그 날 나를 때리긴 했지만 술 안 마시면 안 그래요. 가정폭력은 아니에요.'라며 남편을 싸고도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음주운전'과 '가정폭력'이라는 공적 언어의 위화감이 당사자들을 움츠러들게 하는 것이다. 이 불편함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 당신이 가장 먼저 공부해야 할 것은 근로기준법과 고용노동부 매뉴얼이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①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할 것 ②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을 것 ③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일 것,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충족시켜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때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는 가해자의 직위나 직급이 상위일 경우뿐만 아니라 개인 대 집단과 같은 수적 측면, 감사‧인사부서 등 직장 내 업무의 영향력, 연령‧학벌‧성별 등 인적 속성 등도 고려된다. 고용노동부 매뉴얼에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받은 사례가 수록되어 있으니 모두 살펴보고 나의 경우에 해당되는 내용을 간추려 놓는 것도 좋은 공부 방법이다.
혹시 자신이 파견직·용역직·특수고용직과 같은 간접고용 노동자이거나 공무원이라 근로기준법 적용이 되지 않는 직군이라면 고용노동부가 아니라 다른 경로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틀을 고수하기를 권장한다. 조직 내부에서 문제를 해결할 때는 물론이고, 국가인권위원회 같은 기관에 제소하거나 민사나 형사로 문제를 해결할 경우에도 '직장 내 괴롭힘' 문제가 참작될 수 있도록 하는 게 좋다. 꾸준히 '직장 내 괴롭힘'을 주장하다보면 조직 내부에서 근로기준법에 준하여 관련자들 모두에게 합당한 조치가 이루어지도록 할지도 모른다. 형법 상 '폭행죄'나 '명예훼손죄'나 '모욕죄' 로 다투더라도 직장 내 괴롭힘 사안의 일부일 뿐임을 알려서 서류에 기록되도록 하고, 민사 상 '불법행위'로 다투더라도 직장 내 괴롭힘 문제라는 것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이 좋다. 아직 개정 근로기준법에는 잉크도 마르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직장 내 괴롭힘 처리 매뉴얼 상의 사각지대가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 시간이 흘러 '공무원연금법, 공무원보수규정, 공무원수당규정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공무원에 대하여도 성질에 반하지 않는 한 원칙적으로 근로기준법이 적용되므로...근로기준법 제38조는 공무원에게도 적용된다(대법원94다466판결)'는 판례처럼 직장 내 괴롭힘 사안에 있어서도 국가공무원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입법불비 상태이니 근로기준법이 적용된다는 해석이 나올지도 모른다.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틀을 포기하지 마라. 싸움이 길어질수록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을 것이다.
근로기준법과 고용노동부의 매뉴얼을 공부한 후에는 글의 초안을 작성한다. 초안을 작성하면서 관련 증거도 꼼꼼하게 기록해 놓는다. 이 때는 기억나는 모든 것을 적는 것이 좋다. 두서없이 생각나는 것을 적어놓은 글을 나중에 보면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 드러나는 마법을 경험하기도 한다.
초안을 완성했으면 이제는 어떤 경로로 해결할지 고민할 차례다. 나의 경우는 직속 상사-소속 부서의 장-조직 내 감사실-각 종 외부기관-수사기관 및 법원의 순서로 나아갔다. 나와 가장 가까운 곳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간 이유는 조치를 요구하는 나의 주장에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폭행이나 욕설, 상사의 성추행과 같이 자극적인 사안이었다면 해결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이것저것 잴 것 없이 바로 수사기관이나 법원으로 나아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덕지덕지 덧댄 헝겊처럼 다수의 조직적 괴롭힘 문제, 상사의 무관심과 조직의 외면까지 합창을 하고 있는 문제라면 단숨에 해결하기는 어렵다. 밟아가는 단계마다 사람들은 '왜 사무실 내에서 해결해야 할 일을 여기까지?'라고 물을 것이다. 이 때 앞서 밟아온 단계들을 생략했다면 나를 다시 사무실로 돌려보낼지 모른다. 그렇기에 부당함을 주장함과 동시에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설득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관련자들에게 사과를 요구했으나 무시당했고, 상사에게 재발방지 조치를 요구했으나 묵살당했고, 성실히 조사에 임했지만 나의 목소리는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그 이후에 다른 기관을 통해 일부 인정받았고 수사기관에서도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서두르지 않고 차근 차근 단계를 밟아가며 다음 단계에 가야 할 명분을 쌓았다.
어떤 경로로 해결할지 고민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어느 경로를 거치든 듣는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이다. 실컷 겪은 일을 털어놓고도 막상 이 질문을 받으면 덜컥 겁이 날 수도 있다.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초중고와 대학교까지 나왔지만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또한 이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것 자체만으로 내가 직접 그들에게 해를 가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그들은 형식 상 내 의사를 물어보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당신이 하는 말을 참고할 뿐 그 결과에서는 당신이 하는 말이 반영된다는 보장이 없다. 법령과 규칙, 여러 가지 참작사유로 당신이 하는 말의 극히 일부분만이 실현될 수도 있고 아예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나저러나 당신은 이 질문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당신이 바라는 것은 내 말을 듣고 공감의 눈물을 흘려주는 것이 아닐 테니까. 정확히 어떤 조치를 원하는지, 어떤 조치를 받아야 내가 떳떳해질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공적인 언어를 공부하고, 초안을 작성하고, 어떤 경로를 거칠지, 거기서 내가 요구할 것이 무엇인지 정했다면 비로소 '부당함을 알리는 글쓰기' 준비가 된 것이다.
여기까지도 많이 힘들었겠지만, 힘을 내야 한다.
이 관문만 거치면 이제부터는 나의 글이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고 나를 대변해 줄 것이다.
부당함을 알리는 글쓰기는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나의 문제이긴 하지만 이 문제로 인해 나를 고용한 회사 혹은 국가 기관이 어떤 피해를 입고 있으며 이것이 왜 해결되어야 하는지 설득해야 하고, 요구하는 내용이 현실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글을 받아든 기관이 다른 곳에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 문제를 해결해야 할 당위성도 알려줘야 한다.
설득할 때는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공공의 이익이라는 것을 피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어차피 회사든 국가든 나를 노동자로 데려다가 그 자리에 앉힌 것이고 그들이 나의 개인적인 감정까지 신경 쓸 이유가 없다. 다만 그들의 이익에 해가 될 경우, 즉 법과 규칙에 어긋나거나 생산성을 저하시키거나 국민적 공분을 사서 브랜드 가치를 훼손할 문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러므로 괴롭힘을 당해서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상태라는 것, 그로 인해 신체적 정신적 해를 입었다는 것에 더하여 괴롭힘으로 인해 회사와 국가가 무엇을 잃었는지를 말해줘야 한다.
글을 읽는 조사자나 기관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왜 이 기관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득해야 한다. 그전까지 내가 어떤 절차를 밟아 왔는지, 개인적으로 어떤 노력을 했고 조직 내부에서는 어떤 노력을 했으며 내가 왜 여기까지 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려 주면 된다. 그리고 그 기관이 기준으로 삼는 법조와 사례에 맞는 에피소드를 선별하여 육하원칙에서 그에 따른 피해 및 결과를 더해 7하원칙에 기초해 글을 쓰고(이때 당사자들이 했던 말은 따옴표로 명확하게 제시한다), 에피소드가 끝나는 부분마다 그와 관련된 증거를 명시하는 것이 좋다. 기관 별 적용 법조와 사례는 기관 홈페이지를 참고하거나, 국가법령정보센터와 대법원종합법률정보(판례)에서 검색해 보면 알 수 있다. 혹시나 초안으로 작성한 에피소드들 중 어떤 사안을 선별해야 할지 알 수 없다면 조사자와 함께 상의해볼 수도 있다. 그래도 문제 되는 부분이 누락될까 걱정된다면, 초안을 정황 증거로 따로 제출할 수도 있다.
부당함을 알리는 글의 끝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적는다. 요구는 해당 기관에서 이행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엄연히 법과 제도가 있는데 내가 억울하다는 이유로 공개적 망신이나 조리돌림을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에 합당한 징계와 관련자들의 인사이동이었다. 나만 인사이동되는 것은 부당한 인사조치라고 주장했다. 나만 인사이동이 되면 내가 가해자로서 조치받는다는 소문이 거세질 것이고 내가 옮긴 곳에서도 2차 피해를 당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2차 피해를 100퍼센트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나는 조직으로 돌아갈 경우에 내가 참아야 할 2차 피해와 참지 말아야 할 2차 피해의 기준을 세워 놓았다. 나를 피하거나 따돌리는 것은 어느 정도 감수할 마음이 있지만 나에게 직접적으로 비난을 하거나 업무를 배제하거나 몰아주는 행동, 트집을 잡고 비아냥거리는 행동은 참지 않을 생각이다. 어떤 의도인지 정확하게 물어보고 바로 사과하지 않는다면 2차 피해로 간주하겠다고 경고까지 해 줄 생각이다.
어느 정도 2차 피해를 예상했다고 해서 굳이 소신을 굽히고 나 혼자 유배 가 있는 그림에 뚜벅뚜벅 걸어갈 이유는 없다. 부당함을 주장할 때는 어깨를 펴고 배에 힘을 주고 입을 크게 벌린 상태에서 당당하고 꿋꿋하게 내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어물쩡 넘어갔다가는 또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 십상이다. 강해져야 한다.
부당함을 알리는 글쓰기에서 중요한 것은 빠짐없이 적는 것이 아니라, 적절히 잘 빼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소설가 같은 필력으로 있었던 일을 훌륭하게 묘사한다 하더라도, 내가 처한 상황을 바꾸지 못한다면 그것은 쓸모없는 글이다. 억울한 것을 말한다고 사람들이 그것을 다 들어주지는 않는다. 내가 목이 터져라 외쳐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면할 것이다. 그 사람들이 특히 나빠서가 아니다. 그래 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무력감과 그에 따른 피로감이 엄습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리건 대학의 심리학 교수 폴 슬로빅은 비극적 사건 또는 도움이 필요한 사건의 규모가 너무 크면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는 현상을 '정신적 마비'라고 명명한 바 있다. 정보가 너무 많아도 사람들은 '정신적 마비'를 겪는다. 억울한 마음에 이것저것 생각나고 글이 자꾸 길어지는 것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런 '구구절절'은 초안에 서면 충분하다. 나의 주장을 납득시키고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글은 단순할수록 좋다.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듣고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나 기관을 정확하게 지목하고 그 책임을 피하지 못하도록 직접적인 화법을 쓰는 것이 좋다.
이 글은 완벽한 글이 아니다. 더더구나 나는 변호사나 노무사도 아니다. 내가 걸어온 길도 결코 완전하지 않았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잊고 싶었던 패배의 기록들과 아쉬운 순간들을 들춰 보아야 했다. 그래도 저릿한 손가락 마디를 조물거리면서 이 글을 써야 하는 이유는 어렵게 용기를 낸 누군가에게는 무진장 필요한 글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그리고 직장 내 괴롭힘 문제에서는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유튜브에 직장에서 성공하는 법이나 무례한 사람에게 대처하는 법이 난무해도, 자기 계발서와 희망찬 인문학이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의 대부분을 차지해도 우리 중 70%는 직장 내 괴롭힘을 겪은 경험이 있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익힌다고 세상이 좋아지지는 않는다. 때로는 가젤들의 실전서도 필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