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젤이 싸우는 법 (3)

언제까지 직장 내 가젤로 살 텐가?

by 김반장

소설「백 년의 고독」은 마꼰도 마을에 정착한 부엔디아 가문의 100년간 흥망성쇠를 한눈에 보여준다. 7대에 걸친 부엔디아 가문 속 개인들은 세대에 걸쳐서 반복되는 이름(아르까디오와 아우렐리아노)에 따라 그 이름에 걸맞은 고독한 운명을 살아간다. 인간의 쇠락과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은 모두에게 평등하지만 생(生)의 운명은 세대를 거듭해도 그 이름에 갇힌 듯하다. 5세대 아우렐리아노는 1세대 아우렐리아노처럼 내향적이고 명민하며, 2세대 아르까디오는 1세대 아르까디오처럼 모험적이고 강인하다. 우리 각각의 피에 흐르는 100년 서사는 어떤 모습일지 모르지만, 누구에게나 그와 같이 세대를 거듭해온 굴레가 있다. 어떤 이는 그것을 업보라고 부르고, 어떤 이는 그것을 '재생산'이라고 부른다. 이름이야 어찌 됐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굴레를 돌며 비슷한 선택, 비슷한 실수, 비슷한 반응을 반복한다.

운명은 삶과 삶 이전부터 이뤄진 무수한 선택이 쌓아 올린 습관적 반응에 따라 결정된다. '현재'는 나의 짧은 일생 속 촌각으로 분절된 수많은 생각과 반응들이 도미노처럼 스러져 도착한 곳이다. 우리는 지금부터 또 다른 도미노를 세울 것이다. 그것이 이제껏 반복해왔던 길로 향할지, 아니면 한 번도 간 적 없었던 길을 향할지는 당신의 선택이다. 우리가 가젤이 된 이유는 우리에게 각인된 운명이 그쪽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며, 인간은 고통보다 미지(未知)를 더 두려워하기에 우리는 별생각 없이 우리에게 각인된 고통의 길을 선택해 왔다. 하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엄습했다면 비로소 변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언제까지 가젤로 살 것인가?

안타깝게도 '가젤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행동하는 것'보다는 '무엇인가를 행동하지 않는 것'을 훨씬 난해하게 받아들인다. 아이들이 '불장난을 치지 않고 모래장난을 치는 것'은 가능하지만 단순히 '불장난을 치지 않는 것'은 어려워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기에 이제부터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살아왔던 가젤의 삶에 작별을 고하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을 이야기할 것이다. 이는 내가 평소에 무의식적으로 했던 말과 행동을 스스로 점검하고 갈아엎는 일종의 자기 파괴 의식이다.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고 자신이 예전처럼 행동하고 싶은 마음의 습관이 구질구질하게 나를 붙잡겠지만, 나를 깨뜨려야 내가 산다.


가스라이팅이 시작될 때는 직장 동료, 상사를 어린아이라고 상상해보자. 그렇게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두려움을 먼저 낮춰야 그들의 욕구가 이해되고 조금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직장 선배 하나가 나를 불러내 2시간 동안 집요하게 나의 무릎을 꺾기 위해 가스라이팅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당신은 심장이 요동치고 머리가 텅 비고 숨 막히는 기분이 들 수도 있다. 이 상태에서는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이 오답이다. 불안 수준을 낮춰 제대로 된 사고를 해야 한다. 일단 전화받는 척을 하든, 화장실이 급한 척을 하든 일단 자리를 떠서 혼자만의 공간에서 심호흡을 하며 신체적 반응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린 후 가스라이팅 전장에 나가자. 짧게는 10분 길게는 30분이면 될 것이다. 혹시 반응이 금방 가라앉지 않는다면 직장선배에게 예의 바르게 메시지를 보내 다음 날 다시 약속을 잡을 수도 있다.

불안 반응이 잠잠해지면 돌아가서 직장 선배가 아니라 아주 어린아이가 나에게 말을 한다고 상상해보자. 그 아이는 아이다운 마음으로 자신의 사탕을 뺏기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지만 나를 해할 수 없는 존재다. 그 아이는 경력직으로 이제 막 이 직장에 들어와 위기감을 느끼고 있을 수도 있다. 그 아이는 방금 협력업체 직원으로부터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배설할 출구일 뿐이다. 이럴 때는 이 사람과 '대화'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당신은 어린아이를 '달래줘야' 한다.

아이를 달래 줄 때는 주관식 시험에 응답하듯 솔직하고 직접적인 대답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가 하는 말에 변명하거나 그에게 내가 그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는 주관식 응답은 지워버려야 한다. 그는 이미 자신에게 사로잡힌 상태다. 그가 뭐라고 하든 그것의 진실은 잠시 접어두고 떼쓰는 아이를 달래듯 그의 말에 '그랬구나'라며 수긍해줘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와 같은 대답으로 그가 존중받았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이 그를 달래준 것은 그 자리에서 빨리 빠져나오기 위함이다. 그 사람의 유치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받아주기 위해 한 말이 아니다. 당신은 그의 말을 경청해서도 안되고, 그 사람과 '대화'하여 해결하려고 해서도 안된다. 그럴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질 뿐이다. 당신이 그에게 수긍해준 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일말의 유연성이었다고 해두자.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직장 내 포식자들에게 나를 괴롭힐 구실을 주지 않을 수 있다.


유연하게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면 이제는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를 기민하게 살펴봐야 한다. 혹시나 그가 더 이상 나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당분간은 '말을 아끼고 요새에 스스로를 숨기는 전략'으로 조심스럽게 업무적으로 필요한 협력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나를 공격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다면? 주위 사람들과 약속을 잡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그 사람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한다면? 그의 세력이 다수가 되기 시작하고 왠지 모르게 내가 고립되기 시작한다면? 주위 사람들이 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전해주기 시작한다면?

그가 자신의 의견을 널리 퍼뜨려 다수의 공론으로 만들면 사무실 내에 나를 향한 판옵티콘(죄수를 감시하는 원형 감옥)이 생겨난다. 피할 수 없는 '다수'의 시선으로 권력을 획득한 것이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누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지워진 채 그들이 만든 이미지에 내가 갇혀 버릴 수도 있다. 주체와 맥락이 지워진 비난은 온전히 비난을 받는 사람의 문제성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그들이 다수의 권력으로 '익명성' 뒤에 숨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

당신은 '친절한 진드기'가 되어야 한다. '친절한 진드기'는 목소리 톤을 낮추고 느린 속도로 친절하게, 진드기가 피를 빨듯 끈질기게 물어본다. 끈질기게 물어보는 것은 시선의 권력을 해체하는 작업이다. 나를 비난하는 주체가 누군지, 어떤 말을 하는지 철저하게 물어봐야 한다. 나를 비난하는 자신들의 시선을 들추어내면 그들은 그것만으로 겁을 먹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나의 '시선'을 두려워할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보내야 할 메시지는, '나도 너를 보고 있다' '네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익명성의 가면을 철저히 벗기고 구조에 숨은 발화자를 찾아내 그 속의 보잘것없는 영혼에 직접 말을 걸어야 한다. 그에게 왜 나를 '비난'하고 '고립'시키는지 물으며 내가 바라보는 그들의 행동을 인식시키는 것도 시선의 권력을 해체시키는 좋은 방법이다.

끈질기게 물어보다 보면 오히려 상대방이 화낼 수도 있다. 그가 화내는 이유는 두 가지다. 나의 발언권을 박탈할 의도이거나 나의 질문으로 자신이 수치심을 느꼈다는 뜻이다. 그때는 당황하지 말고 '물어본 건데 왜 갑자기 큰 소리로 화를 내세요?'라며 그들의 행동, 즉 '화낸다' '언성을 높인다' '욕설한다' '째려본다' '삿대질한다' '나를 몰아붙인다'를 보이는 대로 읽어주면 된다.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단호하고 정확하게 말해줘야 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나에게 화를 내는지 흰자위를 번뜩이며 째려보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나를 '괴롭히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내가 아주 하찮은 존재라서 나라는 존재를 생각하지 않고 마음껏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개미 똥꾸멍만큼도 두렵지 않다. 평등한 관계라면 내가 그를 불편해하고 두려워하는 만큼 그도 나를 불편하게 여기고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요약하자면, 질문으로 그들에게 나의 '시선'을 인식시키고, 그들의 행동이 나에게 어떻게 비치는지를 정확하게 알려 주고, 나에게 그것을 '발화할 힘'이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나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며, 당신들이 하는 나에게 행동은 온 세상에 드러날 것이라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그들이 나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강해진다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가젤이 두려워하는 것은 갈등 그 자체이다. 갈등을 회피하고 싶은 욕망에 상대방이 적인지 아군인지 의심하고 판단해볼 새도 없이 섣불리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웃어주고, 순응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뭐든 내어 주고 평화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거기서부터 문제는 시작된다. 언제까지나 갈등을 피하기만 할 수는 없다.

집단 심리학을 탄생시킨 프랑스 의사 귀스타브 르 봉은 1895년 「군중심리」에서 '집단을 이루는 개인 중 한 사람이 최초로 지각하는 왜곡이야말로 쉽게 전파되는 암시 작용의 핵심이다.'라고 했다. 한 사람이 나에 대한 이미지를 최초로 왜곡시키면 그것이 전염되어 군중은 그 이미지를 통해서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군중에게 진실은 중요치 않다. 그들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논리적 연관성 없이 '정신 속에 연상된 이미지'만을 보게 된다. 모든 작용의 중심에는 내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왜곡한 '최초'시선이 있다.

직장 내의 착취는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포식자는 완전히 이빨을 드러내기 전에 슬금슬금 간을 본다. 제2차 세계대전 유럽에서 대규모로 이루어진 유대인 학살도 한 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가 총리로 당선되고 처음 나치스 정권이 수립되었을 때 독일은 친-시온주의적 태도를 취했다. 시온주의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민족주의 운동이다. 시온주의 유대인들은 나치스 정권 초반 독일 당국과 협상하여 팔레스타인으로 자발적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독일의 2급 시민으로서 인정받았으며 자신들끼리 격리되어 살아가기만 하면 큰 문제없을 것이라 믿었다. 그 믿음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38년 11월 크리스털 나흐트(Kristallnacht, 깨진 유리의 밤)라 불리는 학살 사건으로 무참히 깨졌다. 유대인들은 히틀러 정권 초기에 독일인들과 협상했다 믿으며 그들의 뜻대로 스스로를 추방했지만 나중에는 그들의 명령에 따라 죽음의 수용소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양보만으로는 평화가 유지될 수 없다. 내가 양보하고 호의를 베풀어야 할 때인지 그들의 침략에 맞서야 할 때인지 고민해야 한다. 혐오의 심지는 끝내 갈등의 불을 지필 것이다. 이것이 나를 왜곡한 최초의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이유이다.


당신이 그들에게 맞서기로 결심했을 때 당신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것은 '법'이다. '법'으로 그들의 처벌을 구하거나 손해배상을 청구할 때도 중요하지만, '법'을 알아야 내가 다치지 않고 세련된 방어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억울함을 토로하다가 오히려 억울한 사람이 역공당하기도 하는 가장 흔한 죄명은 '명예훼손죄'와 '모욕죄'이다.

'명예훼손죄'는 형법 제307조로 진실을 말하든 거짓을 말하든, 공연히 '누가 ~했다/이다'라는 사실만 말해도 처벌받을 수 있는 범죄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명예훼손은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고의를 가지고 사람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키는 데 충분한 구체적 사실을 적시하는 행위를 말하고, '공연히'라는 말은 불특정 또는 다수인이 인식할 수 있는 상태말한다. 한 사람에게만 사실을 유포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나와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서 비밀을 지킬 거라 예상되지 않고, 불특정 또는 다수인에게 전파될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공연히' 말했다고 인정된다. 언론기관이 기사를 작성할 때처럼 적시한 사실이 진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처벌받지 않지만, '옆 집 아무개가 밑에 집 사람이랑 불륜을 저질렀다.'라던가, '연예인 누구가 스폰서의 지원을 받으며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다.'처럼 사사로운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사실이라면 공공의 이익이라고 인정되지 않는다. 당신이 억울함에 사내 인트라넷이나 SNS에 글을 올리거나 (정보통신망에서 명예훼손을 하면 더 크게 처벌받는다), 자신의 편을 늘리려는 의도로 관련자들에 대한 자극적인 소문이라도 퍼뜨린다면 까딱 잘못했다가는 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명예훼손죄는 반의사불벌죄, 즉 명예훼손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으면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의도치 않게 타인의 명예를 훼손해 고소당한다면 당신은 고소인에게 용서를 받아야 처벌을 면할 수 있다.

'모욕죄'도 이와 비슷하다. '모욕죄'는 형법 제311조로 공연히 타인을 모욕하면 처벌받을 수 있는 범죄다. '공연히'는 앞서 말한 의미와 같고, 모욕은 구체적인 사실이 아니라 욕설과 같이 경멸적 표현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무식이 하늘을 찌르네'처럼 일상생활에서는 그다지 심하지 않다고 여겨질 만한 말도 모욕 행위로 인정될 수 있기에,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관련자들의 SNS에 모욕적인 댓글을 단다 던가, 사람 많은 곳에서 언쟁을 하다 욕설이라도 하면 오히려 당신이 처벌받을 수도 있다. 모욕죄는 고소가 있어야 공소를 제기할 수 있는 친고죄인데, 고소는 그 사실이 있음을 안 날로부터 6개월 안에 해야 한다.

위와 같은 문제 이외에도 직장 내 괴롭힘 관련자들에 대한 징계를 요구할 때에는 나의 주장에 그들이 형법의 '무고죄'로 문제 삼을 만한 부분은 없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제156조(무고) 타인으로 하여금 형사처분 또는 징계처분을 받게 할 목적으로 공무소 또는 공무원에 대하여 허위의 사실을 신고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무고죄에 해당하려면 형사처분 또는 징계처분을 받게 할 목적을 가지고 신고사실이 허위라는 인식을 한 상태로 객관적 진실에 반하는 사실을 공무소 또는 공무원에 신고해야 한다. 처벌을 하는 수사기관뿐만이 아니라 징계권한이 있는 공무소와 공무원에 신고하는 경우도 무고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이때 신고사실이 허위라는 인식은 '처벌받아야 한다'는 고의뿐만 아니라 '처벌받을지도 모른다'는 미필적 고의도 해당된다. 판례에 따르면 허위의 사실이라 생각했는데 진실이었거나, 범인을 착각한 경우, 신고내용에 일부 거짓이 있으나 중요한 부분이 아니고 단지 신고사실의 정황을 과장하는 데 불과하다면 무고죄는 성립하지 않는다.


직장 내에서 먹잇감의 냄새를 지우는데 가장 중요한 덕목은 '감정의 발화'이다. 당신의 감정을 침묵해서는 안된다. 당신의 불안함, 두려움, 억울함을 마음속 깊이 구겨 넣어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 구석에 감정들을 숨겨 놓고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믿지 말자. 괜찮아지는 경우는 조직 내 환경이 변했거나, 당신도 당신이 두려워했던 그 사람들의 일부가 되었을 때뿐이다.

감정을 말하라고 해서 어린아이처럼 감정을 가감 없이 용출하라는 말은 아니다. 감정이 폭발할 때까지 켜켜이 쌓아두지 말고 당신이 느끼는 감정을 해방시켜 줘야 한다는 말이다. 세련되게 당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말하는 것, 그것이 당신이 해야 할 일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떨리는 목소리로 굴하지 않고 한 자 한 자 해야 할 말을 하는 경험은 당신을 성장시킬 것이다. 모든 것은 연습이 필요한 법이다. 집에서 조용히 나의 느낌과 생각, 그들의 행동을 정의하는 언어를 글로 써보거나 나를 대신해 가장 잘 싸워줄 것 같은 가상의 인물을 설정해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지 상상 속에서 지켜보는 것도 좋은 연습 방법이다.


침묵은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오직 행동으로만 당신을 지킬 수 있다.

당신의 성장에 행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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