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었다고 느낄 때가 있다. 핸드폰 사진첩에 늘어만 가는 각종 꽃 사진, 풍경 사진을 볼 때 그렇다. 꽃 사진은 엄마랑 엄마 친구들, 이모나 큰엄마, 또는 권사님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는데! 꽃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 나를 보다가 가끔 ‘어머?’ 싶다. 하늘 사진도 그렇게 찍고, 조수석에 앉아 가로수 사진을 그렇게 찍는다. 아이고 나참.
뭘 바리바리 싸 갖고 나갈 때도 그렇다. 구역예배 가기 전에 커다란 보온병에 커피를 가득 내려 담고 종이컵을 챙기고 밀폐용기에 수박을 잘라 넣고. 이거 옛날에 엄마가 다 했던 거 같은데... 물론 어린 친구들(?)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일찍이 느껴 하늘 사진 많이들 찍기도 하고, 나누기 좋아하는 성정이라면 나이가 어리든 어떻든 먹을 걸 늘 넉넉히 싸서 다니긴 하더라만. 자연도 못 느끼고 게으르기까지 한 나란 인간은 그렇지 못했었는데 언젠가부터 조금씩, 어릴 때 보던 어른들 모습이 내게서도 문득문득 보이기 시작한 거다.
행동도 그렇지만 한 가지 더 놀라운 건 입맛의 변화다. 언제부턴가 치킨, 피자, 햄버거 이런 음식보다 집밥 느낌의 속 편한 밥상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햄버거를 싫어한다고는 안 했다) 당연히 치킨도 먹고 피자도 먹는데, 그것들은 가끔 별식으로 생각날 뿐. 맛있는 밑반찬, 국, 찌개, 제철요리... 아, 누가 차려주는 집밥(?) 매일 먹을 수 없나? 심지어 요즘은 어릴 때 시골 큰집에서 제사 지내고 먹었던 비빔밥이랑 탕국이 자주 생각난다. 그땐 고사리도 무나물도 국 건더기도 다 싫어서 국물에 밥만 조금 말아먹고 그랬는데, 지금 큰엄마가 그거 차려주시면 탕국이랑 비빔밥 진짜 푹푹 퍼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표현이 좀 주관적이지만) 뭔가 어른의 반찬, 어른의 식재료가 좋아진 게 꽤 많다.(물론 여전히 편식한다. 고사리, 무나물 따로 반찬으로 먹으라 하면 안 먹을 거다. 최소한 비빔밥으로 먹으면 잘 먹을 수 있다는 거다. 여전히 떡볶이가 최애 음식인 그런 큰 줄기는 변하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미나리’다. 어렸을 때 해물탕에 들어간 미나리 냄새가 싫어서 이런 건 왜 넣냐며 열심히 골라내고 먹었던 기억이 있는 그 미나리. 몇 년 전 샤부샤부집에 갔는데, 미나리랑 고기를 같이 간장에 찍어 먹으라는 안내문을 보고 일단 시키는 대로 먹어보자 해서 맛을 본 뒤로, 그 샤브집은 나의 워너비 식당 3순위 안에 들어버렸다. 뭐야 이게 왜 맛있어? 왜 향 좋아? 쌉싸름한데 씹을수록 맛있는 특유의 풀 향. 이제 샤부샤부 고기 건져 먹는데 미나리 없으면 섭섭할 거 같다.
‘절대’ 입에도 안 대던 걸 와구와구 먹은 거 하나 더. ‘곶감’이다. 경북 상주분이신 시부모님 덕에 결혼하자마자 곶감을 저절로 좋아하게 됐다.....겠어요? 절대 아니고, 신혼 때 시부모님이 직접 감을 깎아 말려 고생스럽게 만드신 곶감을 내게 여러 번 먹어봐라 먹어봐라 권하셨지만 편식형 며느리는 “우우웅 싫어용 안 먹어용” 시전 하며 손사래를 쳤었다. 입 짧고 음식 가리는 며느리의 결혼생활도 이제 13년 차에 접어들었고, 나는 이제 시아버지가 우리 친정집으로 보내시는 귀한 곶감 세트를 절반 덜어 우리집에 갖고 와버리는 사람이 되었다. 여러분 그거 아셨어요? 곶감 되게 맛있어요.(나만 몰랐나...) ‘옜다 곶감이다’ 했더니 울던 아기가 울음을 뚝 그쳐서 몰래 마당에 숨어있던 호랑이까지 겁먹게 했던 그 곶감 명성답네. 열심히 곶감 뜯는 나를 보고 여섯 살 아들이 치킨이냐 고구마냐 묻길래, 주황색 감을 깎아서 잘 말려 만든 음식이라고 설명도 해주었다.
뭐라 이유를 콕 집을 수는 없다. 절대 안 먹겠다 했던 음식이 분명한데 그냥 어느 날 한번 먹어볼까? 먹음직한데? 이렇게 되어버린 걸 어떻게 설명할까.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했을 뿐인 어린 장금이처럼, 나도 갑자기 먹어보고 싶어서 맛을 봤다고밖에 말을 못 하는 것이다. 고기를 그렇게 자주 먹던 한 친구는 마흔이 넘어가면서부터 거의 채식 수준으로 식단이 바뀌었다고 했다. 일부러 바꾼 게 아니라 점점 고기가 안 당기더라는 것이다. 몸이 안 받는 느낌이라고 했다. 흔히들 나이 들면 입맛이 변한다고 하지 않나. 이게 단순히 순식간에 ‘입맛’이 변하는 게 아니라, 노화되는 몸이 본능적으로 그 나이와 컨디션에 적합한 상태로 점점 변하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친구랑 추측할 뿐이었다. 절대 안 변할 거 같던 것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하기도 하나보다. 내가 꽃 사진 찍는 아줌마가 될 줄 몰랐는데. 내가 곶감을 닭다리처럼 뜯는 사람이 될 줄 몰랐는데!
이런 나를 보고 엄마는 말한다.
“우리 딸이 00를 다 먹고 아이고 오래 살고 볼 일이다!”
00에 들어갈 게 미나리와 곶감 말고도 꽤 많아지고 있다. 고추 장아찌, 구운 마늘, 취나물밥, 곤드레밥... 초밥 먹을 때도 고추냉이를 굳이 쏙 빼내고 먹던 내가 이제 삼겹살이랑 소고기 구워 먹을 때도 고추냉이 올려 먹는 사람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스무 살, 건대 삼겹살 집에서 익힌 마늘은 감자 같다고 나한테 좀 먹어라 먹어라 권했던 어른 입맛 내 친구한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야나두 이제 구운 마늘 잘 먹는다!(물론 편으로 썬 것만 먹는다! 넌 아직 멀었다고 절레절레할 친구 얼굴이 떠오른다.)
사람 안 변한다는 말을 자주 하고 자주 듣는다. 사람은 정말 안 변할까? 천성이란 게 변하기 쉽지 않을 거다. 입맛 변하는 거랑은 비교할 수 없겠지. 그럼에도 미나리와 곶감을 떠올리면 좀 더 유연한 사람이 되고 싶어 진다. ‘절대’라는 말로 쉽게 단정 짓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언제든 변할 수 있음을, 더 좋아질 가능성을 열어두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절대’가 어디 있겠냐고 변화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사람이고 싶지만 사실 관성대로 살다 보니 참 그러기가 매일같이 어렵다.
굴, 브로콜리, 가지... 아직 ‘절대’ 입에 안 넣는 재료들을 생각해 본다. 그것만은 절대 싫어 영원히 안 먹을 거야,라고 하지만 솔직히 어떻게 알까? 10년 뒤엔 내가 데친 브로콜리를 초장에 찍어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나를 모른다. 취향도 꿈도 입맛도 예측하지 못한다. 일단 엄마한테 장수하라고 해야겠다. ‘딸이 굴을 다 먹고 진짜 오래 살 일이다‘ 할 정도로. 아마 꽤 ‘오래’ 살아야 할 거야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