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닮아서 버겁고 닮아서 사랑하는 사람들

닮은 사람들에 대한 고찰

by 아드리셋


1. 둘째


둘째 아이가 자주 버겁다. 그래서 장난 반 진심 반으로(정말 '반반'이 맞는가. 20:80은 아닌가.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남편한테 자주 말한다.


"오빠가 얘 전담공무원 해."

"두 분 황소고집인 거 똑 닮았으니까 두 분 같이 영원히 행쇼..."


둘째는 중간이 없다. 예상하지 못한 말과 행동으로 놀랄 정도로 감동적인 순간을 내게 주거나, 놀랄 정도로 대단하고 엄청나게 내 감정을 나락으로 끌고 간다.

그래서 난 이 아이와 종종 지독한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종종 우린 서로에게 지독한 말과 나쁜 눈빛, 무시 같은 걸 내뱉는다.


지난 겨울. 코바늘로 뜨는 미니 트리에 꽂힌 적이 있었다. 잘 만들지도 못하면서, 유튜브를 보고 또 보면서 한 개를 완성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예쁜 거다. 그 길로 열심히 뜨고 있던 블랭킷을 내팽개쳐버렸다. 그리곤 트리만 색깔별로 세 개를 떴다. 다음 날은 이 색 저 색 조합하면서 두 개를 또 떴다. 초보라 시간이 오래 걸려서 비교적 빨리 지쳤지만, 손이 빨랐거나, 손이 네 개이거나, 손가락 관절이 멀쩡했다면 아마 몇 개를 더 떴을 거다.


뜨개 트리를 바라보다가 불현듯, 둘째를 떠올렸다.

어느 날 갑자기 색종이 하트팔찌에 꽂힌 둘째. 매일같이 열심히 접고 있던 미니카를 하루아침에 내던져버리고 색색이 다른 조합으로 40개의 하트팔찌를 접어 가족들에게 300원에 팔던 나의 둘째.


슬리퍼 끌고 다니는 느낌과 소리를 좋아하는 둘째와 나.

책을 펴면 나는 종이 냄새를 좋아해서 책에 얼굴을 파묻고 킁킁 거리는 둘째와 나.

손가락에 유난히 가시가 잘 박히는 둘째와 나.

일기 쓰기 숙제를 어려워하지 않는 둘째와 나.

모든 감각이 예민하고 감정의 폭이 넓어서 쉽게 기뻐하지만 또 쉽게 화가 나는 둘째와 나.





2. 아빠


아빠랑 사이가 나쁜 건 아닌데 그렇다고 딱히 친하지도 않다. 외동딸이지만 아빠에게 살가웠던 적은 없다.(물론 쌍방이다...)


태초부터 싹싹한 성격이 아니기도 하지만, 청소년기 즈음부터는 아빠랑 점점 길게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말하면 부딪혔다. 신경질적이고 고압적인 아빠의 말투가 싫었다. 내 얘기가 튕겨져 나오는 것 같았다. 엄마는 그래도 남편이니까, 그리고 나보다 부드럽고 평화주의자 같은 성격을 가졌으므로 적당히 이해하며 지냈지만 나는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아빠와의 대화는 줄었다.


부지런하고 계획적인 아빠와, 매사 천년만년에 계획 같은 건 멍멍이나 준 딸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질려했다. 여행을 가면 반드시 밖을 돌아다니고 액티비티를 해야 하는 아빠와, 숙소처돌이인 딸은 자주 '안 맞아 안 맞아.'를 되뇌었다.


직장생활을 오래 한 아빠가 퇴직하신 지 6년이 지났을 쯤이었다. 엄마의 푸념이 늘었다.


때마다 밥 차리는 건 둘째 치고, 아빠가 아침운동 하는 거 빼곤 평일엔 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간다는 거였다. 어쩌다 산에라도 한 번 가는 날엔 꼭 엄말 데려간다고. 종일 아빠랑 한 공간에 있는 게 답답해서 엄마가 어디 나가려 하는 날엔, 어디 가냐 누구 만나냐 꼬치꼬치 캐물어서 아주 죽겠다고 했다.


"당신도 친구를 좀 사귀어 놨으면 얼마나 좋아? 직장동료나, 교회 사람들이나. 박서방이 당신 가라고 무료 테니스 코트도 알아보고 하던데 그런데라도 좀 나가지!"


엄마가 이리 말했더니 아빠가 했다는 대답이 날 너무 소름 돋게 했다.


"나는 친구 없는 거 하나도 안 아쉬운데... 집에서 할 게 얼마나 많은데!"


뭐지. 재방송인가.

일전에 남편이 나한테, 이사온 지 이제 시간도 좀 지났겠다 동네 엄마들도 사귀고 친구를 좀 만들어보지 그러냐며 만날 사람 하나 없는 내가 걱정되고 짠하다 했을 때 나는 말했다.


"나는 친구 없는 거 하나도 안 아쉬운데... 집에서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엄마는 또 어떻고.

엄마가 나한테 무슨 말을 했을 때 내가 이러쿵저러쿵 대답을 하면 엄마는 꼭 그런다.

"지 아빠랑 똑~~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아... 나 진짜 저 '지 아빠랑 똑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 소리 안 듣고 싶다!!





3. 닮은 사람들


둘째가 남편 고집을 닮았다고, 저거 박 씨 아들 맞다고 아주 학을 떼면서도 사실 난 이 아이가 날 더 닮았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기 물건을 여기저기 잘 놓고 다니는 것도, 어디 나갈 때 느릿느릿 준비하는 것도, 서프라이즈 이벤트 만들어주는 걸 좋아하는 것도. 쉽게 상처받고 감탄하고. 도무지 중간이라곤 없는 것도......


우린 사소하게 많이 닮았다. 알고 있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빠랑 다르다고 왜 날 자꾸 아빠랑 똑같다고 하냐면서 엄마한테 자주 바락바락 짜증을 내지만, 나는 사실 아빠를 너무 닮았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다.


지금으로 치면 그저 아빠는 대문자 J, 나는 대문자 P 일뿐. 그뿐이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싫어하는 거. 사교성 없는 거. 욱하는 승질머리. 전반적인 사고의 흐름. 한 번 빠진 취미에 각종 도구를 잔뜩 사들이는 거(엄마는 질색팔색함). 집에서 혼자 할 일이 참 많은 아빠와 나.


비슷해서 더 어려운 사람들.

자석의 같은 극끼리 있는 힘껏 밀어내다 서로가 어려워지는 사람들.


트리를 만들다가, 엄마랑 통화를 하다가.

내가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탁,

'그런 부분마저도' 우리가 같은 것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정말 육성으로 '히익!' 소리를 내고 말았다.

확인사살 같은 것.

쐐기를 박는 느낌!


나는 영락없이 아빠였네.

둘째는 정말로 나네.


코로나가 기승이던 때, 콘서트에 꼭 가야 한다는 나를 엄마는 뜯어말렸지만, 안전문제에 되게 민감한 아빠가 오히려 '좋아하는 건 보고 와야 하지 않겠나'라고 했던 것처럼. 어쩌면 이 사람들이 나랑 제일 많이 부딪치는 거 같이 보여도 어느 한순간,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뜻밖의 말을 던져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이 사람들을 가장 버거워하면서도 이들을 생각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애잔하게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젓가락 두 짝이....


keyword
이전 13화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