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빵을 사러 갔다. 배가 고파서 샌드위치 하나 먹고 갈까 하고 자리 잡아 앉았는데, 옆 테이블 두 엄마 이야기에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이 둘은 오래된 사이, 막 친한 사이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아주 초면도 아닌 것 같다. 근데 얼핏 봐도 핀트가 맞는달까? 둘이 대화가 굉장히 잘 통할 것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긴다. 옆에는 유모차가 한 대 있고 6-7개월 되어 보이는 아기가 앉아있다. 들어보니 그녀들에겐 모두 '1학년 첫째 아들'이 있다. 그게 둘 만남의 연결고리인 것 같은데, 서로의 아이 이름도 '정확하게' 알고 있진 않은 걸로 보아 같은 반 엄마는 아닌 것 같다. 이들은 어디서 만난 사이일까 별 쓸데없는 게 궁금해졌다. 돌봄반 이야기를 하며 자연스럽게 직장 이야기로 넘어간다. 한 명이 휴직 중이라는 말을 하면서 돌봄을 신청할 때는 휴직 상태가 아니어서 그냥 신청했다고 하니 다른 한 명이 자기도 그랬다며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웃는다. 애들이 돌봄에서 친해졌나 봐요- 하는 걸로 봐서 같은 아파트 이웃? 자주 보는 놀이터 멤버? 그쯤으로 혼자 추측을 해봤다. 요가 이야기를 하면서 저도 운동 좋아한다고 맞장구를 치며 또 한 번 까르르 넘어가는 것이, 마치 소개팅의 한 장면 같았다. 둘이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가 아주 잘 통해서 생면부지의 내가 봐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다. 아무리 한 명이 적극적이더라도, 둘 중 하나가 내향적이거나 소극적이면 초면에 이런 대화가 절대 성사 안 되는데. 둘 다 사람 만났을 때 에너지를 얻는 외향적인 성격의 엄마들 같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 조금의 어색함도 없다. 마치 몇 년을 알고 지낸 사이처럼! 아기엄마들 일대일 대화에서 침묵이 흐를 때는 옆에 있는 아기한테 괜히 시선을 돌리기 마련인데,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마음 맞는 친구를 새로 사귀어 들뜬 여고생들처럼, 둘은 서로의 번호를 교환한다. '누구 엄마'로 불리는 게 싫다며 '이름'을 물어보는 모습, 거기다가 자기도 늘 그랬다며 이름 세 글자를 또박또박 말해주는 반응이라니. 이 정도면 거의 영혼의 친구 수준이다. 먼저 이름을 묻던 그녀는 아까 계산할 때도, '어머 어머 제가 살 게요' 하는 흔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각자 계산하시죠!' 라는 생경한 모습을 보이던데. 혹시 미국에서 오래 살다온 분인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까지 해보는 나는 정말 제정신이냐???? '1학년 아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대화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작년까진 여자애들하고 잘 놀았는데 이제 잘 놀지 않는다며, 누구는 여자애들이 너무 과격하다고 말했다 했고, 누구는 여자애들하고 놀면 친구들이 놀린다 했다고 토로한다. 이때부터 거의 내 몸은 이쪽에 있고 영혼은 저쪽에 가서 대화에 끼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아 영혼도 이미 그쪽에 가있었나...) 남자아이들에 대해서 좋게 말해주는 선생님이 거의 없는 거 같다며 다들 딸만 있으신 걸까...하는, 언젠가 나도 옆집 언니와 나누었던 그런 류의 이야기를 나눈다.
아, 끼고 싶다. 아이가 밥을 안 먹어 미치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아, 끼고 싶다... 아이의 가방을 보면 필통이 매번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아, 정말로 끼고 싶다... 아이가 자꾸 꼬... 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한다. 아, 진짜 왜 다 저러지? 끼고 싶다... 아이가 더럽게 놀고도 씻기 싫어한다는, 손이라도 씻으라 하면 손을 5초 만에 씻는다는 얘기를 한다. 아.... 격렬하게 끼고 싶다... 아빠들은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얘기를 한다. 아... 가서 저도 제발 좀 껴달라고 얘기해야 하나.... 그리곤 학교에서 받아온 설문조사 가정통신문 이야기를 하는데, '저거 오늘 아침에 나도 한 건데?' 라며 급기야는 속으로 대화에 끼어본다.(진작에 끼어있었나...) 설문지 내용은 별 거 아니었다. 아이 때문에 행복할 때가 언제인지 속상할 때가 언제인지 두 개씩 골라서 체크하는 거 한 장이었다. 각각 열몇 가지 보기가 있었던 거 같은데 나는 갈팡질팡 할 것 없이 콕 집어 체크했다. 1. 밥 잘 먹을 때 2. 형제자매와 안 싸울 때 굳이 뭐하러 체크하는지 모르겠는 '속상할 때'. 1. 밥 안 먹을 때 2. 형제자매와 싸울 때 '약속을 잘 지킬 때', '바르고 고운 말을 쓸 때', 뭐 이런 보기도 있었는데 밥에 집착하면서 체크한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야-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나랑 똑같이 체크한 사람들을 빵집에서 만났다. 아 옆에 가서 살포시 앉아 볼까... 하는 찰나, 아기 이유식 먹일 시간이 됐다며 놀러 오라고, 자주 만나자는 말을 주고받으며 그녀들은 자연스럽게 자리를 떠났다.
식빵 하나 사러 온 건데... 알지도 못 하는 사람들과 한 시간 동안 내적 대화를 나누었다.(대화라기엔 나 혼자) 그리고 우리 아이만 그런 건 아니라는 점에, 마치 공감 가는 블로그 글 한 편을 읽은 것 같은 위로를 받았다. 1학년 다 똑같구나, 남자애들 다 비슷하구나 하는 위안! 훔쳐 들었다 엿들었다 하면 어감이 좀 안 좋긴 한데... 아니 근데 여긴 테이블이 그냥 바로 옆 자리라 안 들으려야 안 들을 수 없었다고 핑계를 대본다.
우리의 거리 30cm
들리는 걸 어떡해... 이번 생에 집중력 갖기는 그른 것 같다. 샌드위치 먹으면서 글쓰기 숙제 어떻게 써 내려갈지 정리해보려 했는데 망했다. 역시 나는 독방+감금 스타일인가 보다. 오늘은 이 변태 같은 글을 숙제로 올리고 땡을 쳐야 하려나. 나와 아무 관련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 둘의 인연이 오래도록 잘 이어져 나랑 옆집 언니 같은 소중한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언니? 언니 보고 있어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