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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니제주 김철휘 Nov 18. 2024

고양이에게 죽음을...

너는 내 마음의 훈련사 20화

인간은 자신에게 관대하고 타인에겐 엄격하다.
– 탈무드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얼마 전,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이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이 작은 마을에서 일어납니다. 사건의 모든 증거가 열아홉의 청년에게 집중되고 그는 10년의 감옥 생활후 살인 전과자가 되어 다시 마을을 찾습니다. 그리고 조작된 그날의 진실을 하나씩 밝혀 나갑니다. 


미스터리 한 제목만큼이나 드라마는 내용 또한 시청자들의 동화적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일반적인 심리 수사극의 형식을 따르지 않고 환경에 따라 변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심리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적나라하게 조명합니다. 


작품 속 인물들은 '내 자식의 안위와 미래를 위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자식을 철저히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행위를 서슴지 않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 있을까?"라는 탄식을 하게 됩니다. 


특히, ‘부모라는 이름으로’, ‘부모니까 가능하다’는 이유로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을 저지르는 마을 사람들의 행동은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충격과 분노를 느끼게 만듭니다. ‘나라면 저 부모의 상황이라도 절대 저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며, 작품 속 악인들을 향해 '죽일 놈' 합니다. 그리고 나는 상대적으로 '*착한 사마리아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만족스러운 마음이 됩니다.  



고양이에게 죽음을...


우리 강아지 또복이는 산책의 절반 이상을 고양이를 추적하는데 소비합니다. 고양이냄새가 나는 풀숲을 지날 때면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몰라합니다. 그러다 우연히 미처 도망가지 못한 고양이를 만나게 되면 또복이는 잔뜩 상기된 얼굴이 됩니다. 뛰쳐나가고 싶은 욕망 때문에 목줄이 목을 죄어 와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꼬리는 호기심에 프로펠러처럼 둥글게 회전을 하고 낑낑 소리까지 냅니다.


사건이 있기까지 저는 또복이의 이런 행동을 보고 '고양이를 너무 좋아하는 가보다. 고양이와 놀고 싶은가 보다' 했습니다. 내 자식 또복이는 너무너무 순하고 착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강아지니까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건 제 착각이었습니다. 저의 잘못된 일반화였습니다. 또복이는 고양이를 다른 방식으로 좋아하는 개였습니다. 녀석은 고양이를 잡고 입 한가득 깨물고 싶은 욕망을 가진 늑대개의 후손이었습니다. 사냥감을 물어오던 리트리버의 피가, 가족을 위해 맹수에게도 겁 없이 덤빌 수 있는 진도견의 피가 흐르는 개였던 것입니다. 옆집 개가 산비둘기를 잡았네. 쥐를 잡았네, 닭을 잡았네 했을 때 그런 일은 또복이와는 먼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또복이의 입에서 오늘 피를 보았습니다. 그것도 녀석의 피가 아닌 다른 동물의 피를… 


평상시처럼 바닷가를 산책하는 중이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풀숲에서 이런저런 냄새를 탐색하던 또복이가 갑자기 풀숲으로 얼굴을 깊이 파묻는 것입니다. 리드줄을 강하게 잡아당겨도 도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풀숲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녀석은 무슨 신기한 것을 발견한 것인지 꼬리가 좌우로 크게 빠르게 흔들립니다. 아니 아예 동심원을 그리며 급하게 회전까지 합니다. 그런 또복이의 모습은 처음 보았습니다. 


그때 뭔가 작지만 강하게 고막을 진동하는 울부짖음 같은 것이 들립니다. 이상함을 감지한 저는 얼른 또복이를 있는 힘껏 당깁니다. 순간 저는 제 눈을 의심합니다. 또복이의 입에서 새끼고양이가 ‘툭’ 하고 떨어지는 게 아닙니까. 손바닥만 한, 너무 작고 연약한 녀석이었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저는 또복이를 얼른 고양이로부터 떼어냅니다. 언뜻 보기에도 다리를 심하게 물린 새끼 고양이는 필사적으로 깊은 덤불 속으로 몸을 숨깁니다. 저는 어찌할 줄 몰라 사건의 장소에서 얼른 또복이를 물리치고 풀숲을 헤집어 봅니다. 새끼 고양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 이런...' 


그리고 주변을 살핍니다. 


'누가 본 사람은 없겠지?'


다행히도 이른 아침 인적 드문 곳이란 또복이의 만행을 직관하고 있던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말의 안도감이 몰려오고 저는 얼른 그 자리를 도망치듯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또복이를 보았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천진난만한 아니 아직도 상기된 그것도 행복감으로 아주 상기된 얼굴입니다. 


'아~ 이 녀석...'


갑자기 죄책감이 몰려옵니다. 심한 상처를 입은 고양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걱정이 됩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 찾을 용기는 나지 않습니다. 마치 가스불을 켜두고 나온 사람 모양 얼른 집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자위합니다. 


'아니야 그렇게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을 거야. 조금 있으면 상처는 아물고 다시 건강해질 거야'


아니 또 이런 몹쓸 생각도 합니다. 


'어차피 도로 위에서 사는 길고양이 었어. 다른 동물들에게 당할 수도 있고 차에 치여 죽을 수도 있어... 또복이가 아니었어도 사고는 일어날 수 있는 거니까'



나는 선한 사마리아인인가?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일까?


심리학이론 중, 행위자-관찰자 편향(Actor-Observer Bias)이란 게 있습니다. 자신이 행위자일 때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외부 귀인을 하고, 관찰자인 경우에는 타인의 행동에 대해 내부 귀인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우리는 자신이 실수할 때는 상황을 탓하고, 타인이 실수할 때는 그들의 성격을 탓한다는 것이죠.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같은 태도가 이에 해당합니다. 예를 들어 운전할 때 자신이 과속하면 급한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을 추월해 빠르게 달리는 차를 보면 그 운전자의 성격이 급하거나 난폭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어?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을 거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정말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만약 그 새끼 고양이의 보호자가 있었더라면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내 강아지 또복이에게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면 내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세상일은 알 수 없고 벌어진 사건과 상황 이면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런 이유를 다 생각하고 고민하기에는 우리 삶이 너무 바빠서일까요? 우리는 쉽게 사람 탓을 합니다. 내 자식 내 가족을 위해 타인의 생각과 상황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위험에 처한 사람을 두고 그냥 지나쳐버린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의 '제사장'일 수 있고 '레위인'일 수 있습니다. 두 인물을 두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두 사람에게 촌각을 다투는 급한 일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다친 사람의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요. 


자기 아이를 보호하고 싶은 본능이 타인의 생을 짓밟는 순간까지 이어지는 인간의 연약함과 어두운 욕망,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비극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또복이의 천진난만한 얼굴 위로 새끼고양이의 모습이 오버랩됩니다. 그리고 조용히 기도합니다. 


'미안하다 냥이야~ 부디 잘 살아다오~ ㅠㅠ '




주)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예수님이 이웃 사랑의 중요성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한 비유입니다.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 10장 25절에서 3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한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에게 습격당해 모든 것을 빼앗기고 심하게 다치는 사건입니다. 그 후, 한 제사장과 한 레위인이 그를 지나치지만, 그들은 그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반면, 사마리아인이 그를 발견하고, 그의 상처를 치료하며, 그를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유대인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지만, 그는 그 사람을 도와주며 진정한 이웃의 의미를 실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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