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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ndys Sep 11. 2020

"무슨 고객센터와 얘기하는 것 같네요."

며칠 전 회사일로 고객과 만날 일이 있었다. 캐주얼한 분위기에서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식사를 마친 뒤 마침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아 못다 한 근황과 서비스에 대한 피드백을 주고받던 중 그는 문득 “요즘 하는 일은 재밌으세요?”하고 물었다.


일의 재미라…. 고객으로부터 서비스에 대한 얘기가 아닌, 나 개인의 근황을 묻는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날 고객과의 만남은 분명 즐거웠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지만 그의 질문에는 쉽사리 "네."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질문을 곱씹을수록 ‘일의 재미’는 그날의 재미와는 별개의 영역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재미를 느끼며 일하던 때가 언제였던가 가만히 생각해본다.


대답을 고르는 동안 지난 몇 달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어느새 평범한 회사원이 되어 회사 밖의 주변 친구들에게 종종 투정을 부렸다. 좋아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려워서, 대학생 때 꿈꾸던 멋진 직장인이 아닌 것 같아서, 업무량이 너무 많아서… 등 이유는 다양했다.

고객이 가볍게 던진 질문에 복잡해졌던 머릿속과는 달리 나는 어느샌가 그에게 술술 대답하고 있었다. "힘든 부분도 있지만 고객과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눌 때 즐거움을 느낀다"라고. "이렇게 고객들을 만나는 때야말로 에너지를 얻어가는 시간"이라고. 진심이었다. 다만 생략한 말들이 많았을 뿐. 고객을 앞에 두고 있으니 복잡했던 속마음을 내비치기보다 비즈니스적인 대답이 술술 나왔달까?

진심이 담아 말하긴 했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니 어딘가 거짓말쟁이가 된 것처럼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쿠션 멘트'의 달인인것을. 아무래도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위로하려던 찰나, 그는 “무슨 고객센터와 얘기하는 것 같네요.”라며 장난스럽게 답했다.


정직한 매뉴얼 같았던 내 대답의 의도를 알아차렸을까 싶어 괜히 중언부언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말을하면 할수록 진짜 속마음이 들통나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와의 만남 이후 그의 마지막 말을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말할 때 친절하지만 어딘가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던가 고객센터 같다는 피드백은 대학생 시절부터 친구들로부터 몇 번 들었던 것도 같았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대외활동으로 호주 시드니에 갔을 때였다. 팀의 리더 L은 나보다 4살이 많은 선배였다. 특별히 그가 리더십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팀에서 나이가 제일 많아 리더가 된 케이스였다. 몇 달간 그를 지켜봤을 때 그는 자신이 맡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변명부터 늘어놓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그런 면이 지독히도 싫었고 팀 활동에 지장을 주는 단점이어서 그 문제로 몇 번이나 그와 대화를 했으나 그는 한결같았다.


대외활동을 성공적으로 마치려면 어떻게든 각자 제 몫을 다해야 했기에 그를 어르고 달래서라도 일을 하게 해야했다. 결코 그의 노력이나 고생을 치하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그 앞에서는 “선배도 힘들겠지만”이나 “선배도 고생하는 건 알고 있지만” 등의 멘트를 붙여가며 그를 다독였다. 그를 같이 싫어하던 친구 최는 '너는 어쩜 싫어하는 티가 하나도 나지 않냐'며 나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심리 검사를 하면 나는 늘 다른 사람보다 ‘공감’에 대한 수치가 항상 높게 나오는 편이다. 아마 10년 전 영화관 아르바이트를 하며 배웠던 ‘고객에게 공감하기’와 ‘쿠션 멘트 붙이기’의 영향이 있었으리라. 공감 능력이 좋다는 것은 상대방을 배려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언제나 장점일 줄만 알았는데 겪어보니 항상 그런 것도 아니다. 학습된 공감은 장점도 있지만 때론 불필요하기도 하므로.
 
고객센터와  얘기하는 것 같다는 말을 곱씹으며 오늘은 좀 더 솔직한 대답을 해야지 하고 다짐해본다. 사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강점 혁명>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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