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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ndys Dec 25. 2018

"당신 지금 금 밟았어!"

우리도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까?



나에게도 있었다. '당신 지금 금 밟았어!'라고 말해주고 싶었던 순간. 


한 번은 친구와 약속을 잡았을 때의 일이다. 20대 초반, 모 대외활동에서 만난 성향이 꽤 비슷했던 친구와의 약속이었다. 둘 다 외향적이고 일상에 빈틈없는 일정으로 늘 바빴던 점이 닮아 정보 교류를 곧잘 했던, 유난히 말이 잘 통하는 친구였다. 둘 다 국제기구 입사를 꿈꾸며 각자 해외에 거주하기를 3~4년이었던지라, 그 친구와도 못 본 지 꽤 오래되어갈 즈음이었다. 모처럼 연락이 닿았던 터라 무미건조했던 일상 속 특히 기대가 됐다. 게다가 같은 꿈을 그리던 청년들이 어느새 강남역 직장인이 되어있지 않은가. 못 만난 세월 동안 무엇이 우리를 국제기구가 아닌 강남역 직장인으로 만들었을지를 놓고 진한 회포를 풀 생각에 약간은 들뜨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약속 당일, 친구는 갑작스럽게 쏟아진 업무로 야근이 불가피할 것 같다며 아쉽지만 약속을 미뤄야 할 것 같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바로 내색하기보다, 곧 볼 수 있으리란 희망과 함께 다음을 기약하는 쪽을 택했다. 곧 두 번째 약속이 정해졌다. 약속을 며칠 앞두고, 친구는 독감에 걸려 컨디션이 난조라는 이야기와 함께 만남을 다음으로 미뤄도 될지 물어왔다. 유독 유난스러운 한파가 몰아치던 2월이었으니 납득이 갔다. 날이 풀리면 보자는 이야기와 함께 약속은 다시 3월로 옮겨졌다. 이윽고 세 번째 약속 날짜가 정해졌지만, 약속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설마 또..?'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번마저 다른 이유로 약속이 미뤄질까 싶었다. 노파심에 약속을 앞두고 미리 물어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는 몇 년 만에 생긴 여자친구와의 휴가가 잡혔다며 다른 날짜는 안 되겠는지 물어왔다. 정말 미안하다는 이야기도 잊지 않은 채. 


사실 이쯤 되니 만남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져 있어서인지 그러려니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약속을 세 번이나 연기할 만큼 나란 사람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에도 나와 친구의 사정으로 두 어번 정도 약속이 더 연기되었고 1월에 보자던 약속은 겨울과 봄을 지나, 여름이 되어도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혼자서만 만남을 기대하고 옛날 추억에 젖어있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그는 매번 미안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약속을 번번이 깨어버리는 친구에게 서운한 마음은 켜켜이 쌓여갔다. 진짜 미안하긴 한 건가? 란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용기가 없었다. 상대방에게 기분이 상한 것을 들키기라도 하면 혹여 예민한 성격이라고 되려 핀잔 맞진 않을지, 쪼잔한 사람으로 비치지는 않을지를 먼저 걱정했다. 게다가 나는 상황을 한참 곱씹어 본 후에야 스스로 그때 왜 기분이 상했었는지 파악하곤 해서, 화를 낼 타이밍을 매번 놓치기 일쑤였다. 타이밍을 놓친 화는 때론 불필요했다. 그래서인지 수더분하게 쿨한 척 넘겼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감정은 곧잘 상했다. 며칠이 지나 그 순간들을 곱씹어 볼수록 나는 쿨한 척에도 서툴 뿐 아니라 결코 쿨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그러나 문제는 나의 쿨하고 쿨하지 않음에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문제는 남을 배려하지 않는 상대방에 있었다. 다른 약속이 있다며 내게는 단 한 시간의 시간도 내지 않았던 그에게는 '다음에 보면 되지~' 하고 좋게 좋게 넘어갔다. 물론 기분은 무척 상했지만. 가까웠던 친구라서, 얼굴 붉히기 싫어서 “당신 금 밟았어”라고 말하지 못했던 나와, 금 밟는 줄 모르고 금을 넘은 친구와는 올해 연말이 다 되도록  여태 만나지 않았다. 사실 예전만큼 그와의 만남이 기대되지 않을뿐더러 애써 약속 잡는 것 자체에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아서이다. 지금 같아서는 시간이 된다한들 “노 땡큐!”일 것 같다.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라는 노래 가사처럼 만날 사람은 인연이 되면 만나게 되겠지 싶어 그와의 약속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책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정문정

노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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