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이다. 오랜 연휴가 끝나고 밤새 잠을 설쳐 일찍 일어난 김에 남들보다 이른 출근을 해볼까 싶었다.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집을 나선다. 한창 출근 시간이던 이른 아침, 2호선의 지옥철을 간신히 견디며 강남역에 도착했다.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내리자 난데없이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훅 당겼다. 출근하기도 전부터 사람에 치여 지쳐버린 까닭이리라. 문득 지난 1년간 거의 매일 아침, 모닝커피를 짝꿍처럼 달고 지내다시피 한 내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갑자기 툭, 한 장면이 스친다.
2012년 추운 겨울 아침, 해도 뜨지 않은 캄캄한 새벽 여섯 시 차를 타야 겨우 출근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던 서울역 근처 카페베네. 앞에는 세븐럭키 호텔, 뒤로는 남산 타워가 있던 그곳. 오피스 빌딩 안에 있는 커피숍이라 아침이나 점심시간이면 직장인들로 늘 붐볐다. 커피는 못 마시는 커피숍의 아르바이트생이었던 스물 세 살의 나는 익숙하게 출근해서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한결같이 얇고 유난히 통풍이 잘되던 반소매 유니폼을. 본격적인 일을 시작하기 전 마음에 드는 곡을 틀어 노동의 준비를 마치고는 난방기를 틀고, 문을 연다. 매장 한 켠에는 새벽에 도착한 MD들이 가득 쌓여 있다. 우유와 원두, 식자재 따위를 정리하고, 커피 머신을 예열하는 일을 하고 있으면 퀭한 모습의 손님들이 하나둘씩 모닝커피를 사러 온다.
낡은 커피 머신은 기온이 영하로 내려갈 때면 예열까지 시간이 더 더뎠다. 이놈의 머신은 언제쯤 바꿔줄는지. 커피 머신이 준비되는 것을 기다리다 투덜대며 떠난 사람도 있는 한편 묵묵히 커피가 내려지기만을 기다리던 사람도 있었다. 지루한 기다림은 그들의 몫이었지만 대기 줄이 길어질 때면 괜히 아르바이트생인 나는 조급해졌다. 직장인들은 왜 이렇게 아침부터 커피를 많이 마시는 걸까 라는 씁쓸한 질문과 함께.
매일 아침 8:10 AM에 꼭 맞춰 방문하던 손님이 있었다. 그는 옆건물 S 사에 다니는 것 같았다.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중년의 직장인. 그와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보는 사이였지만 음료를 주문하는 것 외에 별다른 안부 인사를 묻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는 그저 몹시 추운 겨울이나, 몹시 더운 여름에도 한결같이 "따뜻한 아메리카노 주세요"로 시종일관할 뿐이었다. 결제할 때면 S 사의 로고가 한쪽 귀퉁이에 박힌 은은한 보라색 카드를 내밀었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다는 멘트와 함께 커피를 건넸다. 그는 이따금 그 자리에서 한 모금 마시고는 종종 미소지었다. 내가 내린 커피가 실제로 맛이 좋았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23살의 나는 '이 사람은 참 매일 같이도 커피를 마시네. 커피가 그렇게 맛있나?' 하고 어렴풋이 짐작했다.
6년 후, 오늘. 그 사이 나는 직장인이 되었다. 문득 스친 23살 아르바이트하던 기억을 꺼내 보다 결국 출근길에 있는 스타벅스에 들렀다. 그곳에는 자주 보는 크루들이 일찌감치 출근해서 이미 따뜻하게 커피 머신을 데워뒀다. 머신이 준비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그란데 사이즈 주세요, 가져갈게요." 습관처럼 주문하고는 기다릴 틈 없이 커피는 1분도 채 안 돼 금방 나왔다. 커피를 집어 들고 회사까지 걸어가며 나는 문득 <이해>라는 단어를 곰곰이 곱씹었다.
커피를 못 마시던 6년 전 아르바이트생이 이제는 매일 같이 커피를 홀짝이는 직장인이 됐다. 단어를 '경험'하는 느낌이란 이런걸까. 아침마다 그들이 왜 그렇게 커피를 찾았는지, 6년이 지난 지금에서야-직장인이 되어서야- 나는 그들을 비로소 완벽히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2018.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