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반 L은 웃음이 절로 나오는 귀여운 외모와 귀여운 말투를 가졌다.
어른이 보기에는 한 없이 귀엽고 아이다운 사랑스러운 아이인데...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말이 조금 느리기도 했고, 피부 질환이 있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이다운 지저분한 습관을 아직 고치지 못했다. 이미 사회화가 되어가고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꺼려질 수 있는 그런 행동들이다. 거부하는 친구와 아직 인식하지 못하는 아이 사이의 간극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상담기간에 L 학부모님도 상담 신청을 하셨다. 붉은 갈색으로 염색을 하고 곱게 화장을 하신 분이 들어왔는데 엄마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많아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멋쩍게 웃는 얼굴로 본인을 L의 할머니라고 소개하시며 자리에 앉았다. 부모님이 계신데 할머니가 오셔서 의아했다.
할머니는 나긋나긋하게 찬찬히 L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기 시작했다. L의 엄마는 장애가 있다. 집 밖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동안은 집에서 지냈다고 했다. 엄마를 집에서 돌보는 사람은 L의 아빠다. 그러니 바깥일은 할머니가 도맡아 하시는 듯했다. L이 자라면서 엄마에 대한 의문을 품고 가끔은 불만이 있을 때마다 할머니는 손자가 이해할 수 있게 잘 다독여 말씀을 하신 듯했다. 그래도 지금은 딸이 많이 좋아져서 일주일에 이틀은 복지원에 나가서 일을 한다고 했다. 그것이 그렇게 기쁘시다고... L도 엄마가 일을 하게 되어서 좋아한다고 말이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마음도 촉촉해졌다. 장애가 있는 딸을 키우면서 얼마나 고민을 하셨을지... 딸이 엄마가 없어도 잘 살 수 있도록 가족을 만들어 주려고 또 얼마나 애를 쓰셨을지... 손자들이 부족함 없이 지내도록 또 얼마나 공부하고 노력하셨을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늠할 수 없는 세월의 무게에 먹먹했다.
L은 생각이 많은 아이였고 호기심도 많은 아이였다. 가끔은 꼬마 철학자 같은 모습에 미소를 짓게도 했다. 그러다가도 어느 날은 표정도 어둡고 말이 없는 시간이 있었다. '왜 그러지? 무슨 일이 있나?' 생각하던 찰나, 할머니가 또 상담을 신청하셨다. 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집에서도 비슷하게 침체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할머니와 상담을 하면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보시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다. 집 가까운 곳에 놀이치료센터가 있으니 한 번 가보시라고 했다. 사실 진료를 받아 보라거나 상담을 받아보라고 말하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다. 하지만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할머니는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으셨다. 놀이치료센터에도 바로 가 보신 듯했다.
몇 주가 지나고 할머니가 학교로 전화를 하셨다. L이 놀이치료를 받고 있는데, L이 엄마랑 같이 다닌다고 말이다. L도 엄마도 함께 센터에서 치료를 받게 되어 더 좋다고 하셨다. 그간의 소식을 기쁜 마음으로 전해 주시니, 나 역시 감사했다. 할머니는 삶의 짐을 많이 지셨는데도 소녀같이 즐거워하셨다. 전화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가을 운동회를 할 때다. 운동회 진행상황도 살피고 우리 반 아이들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L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선생님~"해서 돌아보니, 할머니가 딸 손을 꼭 잡고 한걸음 한걸음 걸어오셨다. L의 엄마다.
"선생님, L 엄마예요. 이제껏 학교에는 한 번도 안 왔는데, 오늘 처음 왔네요."
할머니는 자신에게 기댄 딸을 부축하고 오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 L 엄마시군요. 반갑습니다. 잘 오셨어요~"
할머니, 엄마 그리고 L은 누가 봐도 한 가족이었다.
선하고 귀여운 인상이 딱 봐도 한 가족!
학교에 와도 인사 한 번 안 하고 가는 학부모님들도 많은데, 아들의 담임 선생님이라고 소개해 주며 인사를 시켜주신 할머니가 참으로 고마웠다. 운동회의 많고 많은 추억 속에서도 당연코 인상 깊은 장면이다.
L을 담임하는 동안만 할머니를 뵙게 되었지만, 두고두고 마음 깊이 존경을 표하게 되는 할머니다.
할머니를 떠올리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할머니 안녕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