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어깨 위 밥풀의 무게
우리에게 설거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설거지는 일상, 질서, 청결과, 심지어는 성평등과도 관련이 있죠. 독자님들이 설거지 거리가 있다는 거 자체가 집밥을 먹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하죠. 설거지를 하셔야 하는 분이 돌봄의 큰 책임을 담당하신다는 뜻도 되고요. 무거운 어깨 위에 설상가상으로 설거지 거리가 쌓여 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고작 밥풀의 무게에 짓눌려 더 우울해야 하는 이 상황, 근데 진짜 흔한가 봐요.
산후 우울증이 왔는데, 아이가 아픈데, 실직을 했는데, 그릇을 싹 말린 후, 크기 별로 정리해서 살림 유투버처럼 찬장에 예쁘게 넣으라고요? 사람 쓰면 된다고요? 앱이던 전화던 가사도우미 한 분씩 견적 확인하고, 연락해서 약속 잡고 창피한 이 집을 남에게 공개하라고요? 다른 가족은 뭐 하냐고요? 그 얘기하면 싸움만 나니 더 이상 언급하지 맙시다.
밥풀이랑 반찬 찌꺼기는 눌어붙거든요. 지금 자리에서 일어날 기운도 없는데 이걸 무슨 힘으로 그릇을 싹싹 벅벅 닦냐고요. 게을러서가 아니에요.
저기 저 밥그릇이 왜 제 자리에 못 가고 있을까요. 일상의 리듬이 깨졌을 때. 아무도 도와주지도 않을 때.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하찮게 생각하는 일이 왜 이리 힘들어졌을까요.
해법은 역설적이지만, 지금 당장 설거지를 하지 않는 겁니다.
근육남 휴버만 교수님은 미루는 습관이 있을 때, 해야 되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해보랍니다. 예를 들어 시험공부를 하려 하면 막 책상 정리를 하고 싶잖아요. 그게 더 쉬운 일이니까요. 그 반대로 해야 해요. 공부보다 더 싫고 어려운 일을 먼저 하면 공부는 쉬워진답니다.
근데,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리면 시험공부 못하잖아요? 그래서 휴버만 교수님이 추천하는 건 냉수로 샤워하는 거예요. 저온에 몸을 노출하는 것의 신체적 정신적 효과에 대한 연구가 참 활발하더라고요. 교수님은 딱 2분만 가장 차가운 물로 샤워해 보라 하시네요. 그때 나오는 도파민의 양은 코카인 같은 마약을 했을 때보다 더 효과가 좋고, 오래 지속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냉수 샤워는 아침에 하는 거래요. 자세한 내용은 다음 주 "우울한데 머리 감는 법"에 쓰겠습니다.
또한 오소희 작가님은 말합니다. 잃어버린 나를 찾고 싶다면, 절대로 집에 있으면 안 된답니다. 밖으로 나가야 된대요. 아침에 일어나 단장을 하고,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도 밖으로 나가라고 해요. 설거지요? 그거 보고 있으면 한숨만 나오잖아요. 당장 예쁜 카페 가서 커피 한 잔 하러 나가세요. (아침 커피는 최대한 각성 효과를 누리려면 일어난 후 90~120분 후가 좋다네요.)
그까짓 설거지 하겠다고, 커피 값 아깝다고, 밖에 안 나가고 집안에 있다 보면 설거지도 못하고 인터넷만 들여다보고 있을걸요?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라 배달앱을 열게 되었네요. 배달 음식에 비하면 커피 값 얼마 안 해요. 지금은 설거지 보다 햇빛이 더 중요해요. 당장 밖으로 나오세요.
고미숙 선생님 역시 그러시대요. 집은 베이스캠프가 되어야 하고, 활동의 현장이 되면 안 된답니다. 휴식과 충전도 지나치면 몸에 해롭다나요? 기혈이 막혀서 울적해지거나 화가 치미기 십상이라, 집에 머무르는 시간은 아주 짧아야 된대요. 식구들은 다들 뿔뿔이 흩어져 자기 일을 하고 들어와 밤에 생사만 확인하면 된대요.
아, 특히 백수들은 집에서 두 끼 이상 먹지 말라고 하시네요. "해가 뜨면 무조건 튀어나온다"가 행동 강령이 되어야 한 답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동선과 리듬을 찾는 것입니다. 우선 내가 몸을 밖에서 움직여서 모터에 탈탈탈 시동을 걸어야죠. 설거지는 그다음 얘기예요.
세 분 다 굉장히 다른 삶을 사신 분들인데 조언들의 방향이 비슷비슷하네요. 쉬운 일이 어려워질 때, 더 어려운 일을 해보세요. 설거지보다 더 어려운 걸 해봐요. 밖으로 나가세요. 이불 밖이 위험한 게 아니라 지금은 이불 안이 훨씬 위험해요.
저에게 설거지는 가장 싫은 가사 활동이에요. 저희 어머니는 정말 부지런하셔서 주방에 설거지 거리를 절대 두지 않으세요. 재작년 친정집에 장기 방문했을 때, 제 몫이 된 설거지가 너무 싫어서 과감히 12인용 식기세척기를 주문해 버렸어요. 효도의 이름을 빙자했으나, 진실은 제가 워낙 설거지를 귀찮아하기 때문이에요.
기사님이 주문 후 이틀 만에 집에 오셔서 설치는 물론이고, 뜯어낸 하부장 문을 잘라서 옆에 수납장까지 보너스로 만들어 주시는 걸 보고 깨달았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전 세계에서 극진히 대접해야 하는, 귀하디 귀한 민족이구나!
그래서 결론은 뭐다? 설거지 좀 안 했다고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살다 보면 설거지 거리 쌓이는 날도 있는 거죠 뭐. 그래도 찜찜하시면, 밖에 매장에 가서 식기 세척기 좀 구경 좀 해보세요. 요즘 국산 제품 얼마나 잘 나왔는지 몰라요. 옆에서 딴지를 걸면 언제 적 얘기를 하고 있냐, 정말 잘 닦이고 훨씬 더 위생적이고 물도 엄청 절약된다고 말씀하세요.
아, 식기 세척기 이미 있으세요? 그럼 개구리표 식기 세척기 세제 (Frosch가 독일어로 개구리예요)를 사서 집에 들어오세요. 제가 독일 살아서가 아니라, 설치 기사님이 개구리표 세제가 한국 기계 (S사꺼)에 잘 맞는다고 추천하시더라고요. 대충 접시에서 물에 쓱쓱 큰 덩어리만 떼어주면 돼요. 꼼꼼히 초벌 세척 같은 거 필요 없어요. 기계가 오래돼서 그릇 꺼내봤는데 뭐가 아직도 묻어 있다면, 세척기 한 번 더 돌려주면 되지요.
세척기 안에 이제 깨끗한 그릇 많이 생겼잖아요. 이제 시작이에요. 조금씩 조금씩 하면 돼요. 당신은 집의 돌봄을 책임지고 있는 정말 중요한 사람이에요. 그까짓 설거지, 한꺼번에 다 안 해도 돼요. 대충 놔두어도 해도 돼요. 햇빛 받고 바람 쐬고 피가 좀 돌기 시작할 때, 그때 한 번 더하면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