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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 운명이라는 것을 믿고 싶어 지는 것이다

by 시루

올해 어느 날 퇴근하고 샤갈전을 보러 갔다.



하루 업무는 너무나 지쳤고, 운동은 이번 주에 이미 많이 했으며, 친구를 불러 술을 먹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던 날이었다. 이럴 때는 내 안의 어떤 반항아가 스멀스멀 깨어나고 만다. ’지금 일상과 가장 정 반대의 것을 하러가야겠어‘ 그렇게 나는 눈앞의 화학식과 컴퓨터 앞에서 도망쳐, 초현실주의의 혼란스러움에 빠져들기로 결심한다.



다행히 화요일 오후 6시 30분의 전시회장은 매우 한적했다. 샤갈이라고는 하늘을 나는 사람밖에 모르는 나는 도슨트도 없이 이리저리 유영하기로 한다. 그러다 한 화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세 종류의 꽃과 초록 풀이 매섭게 그려져 있는 특별할 것 없는 그림이다. 제대로 된 이름도 없었던 것 같다. 습작#1 혹은 화병#1 이 아니었을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 한동안 그 앞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전시를 나와서 처음으로 직접 포스터를 사 집에 장식하고는, 자주 들여다보고는 했다.



삶은 가끔 한 줌의 특별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빠져들고 마는 이런 미스테리한 순간을 선사한다.



우연히 사게 된 핑크색 작약이 그림과 똑같은 모습으로 흐드러졌을 때도 그랬다. ‘이제 빨간 꽃과 흰색 거베라만 사면 저 그림과 똑같은 화병이 완성되겠어’ 생각하며, 꽃시장에 가뭄이 드는 여름이 지나가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중. 가을이 오자마자 친구에게 우연히 하얗고 빨간 꽃들을 선물 받았을 때도 그랬다. 삶은 무언가를 애타게 노력하고 갈구해야 겨우 완성되는 것들이 있는 반면, 때로는 우연히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테트리스처럼 완성되는 순간 또한 찾아온다.



아- 이럴 때면 나는 운명이라는 것을 믿고 싶어 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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