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늙은 부부와 아기의 이야기
어느 날 바람이 불었다. 날카롭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그저 오래된 것들을 조용히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이었다. 그 바람을 따라 유다의 산골 마을로 향했다. 이따금 들려오는 이름이 있었다.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말하고, 때로는 눈짓으로 남긴 이름.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따라 조용히 걸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 대해 들은 이야기 조각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들 곁에 있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도, 누군가의 입이 열렸을 때도, 나는 거기에 없었다. 다만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의 눈에, 귀에, 가슴에 담긴 진실을 오랜 시간 들으며 그날을 그려보았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조용한 여인이었고, 마을에서는 오래전부터 안타까움의 눈길로 바라보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나이가 많았고, 아이가 없다는 사실은 사람들 사이에서 곧잘 이야깃거리가 되곤 했다. ‘왜 그럴까’라는 말 대신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이 더 많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때로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뜻을 담고 있음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몇몇은 믿지 않았다. 몇몇은 믿고 싶어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사벳의 배가 점점 불러왔기 때문이다. 그 장면을 기억하는 이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옷이 두꺼워서 그런 줄 알았어요. 근데, 어느 날 아침, 그녀가 마당에 나왔을 때… 무릎 위에 손을 얹고 걷는 걸 보았거든요. 그 순간 알았죠. 정말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걸요.”
그녀는 말을 아꼈지만, 눈빛은 숨기지 못했다. 고요한 기쁨이 얼굴을 감쌌다고 한다. 엘리사벳의 웃음은 오래된 돌담 사이를 다시 살아나게 했고, 그녀가 내딛는 걸음마다 이 마을에 봄기운이 번진 것 같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녀 곁의 즈가리야는 달랐다. 그는 침묵 속에 있었다. 누구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아기가 잉태되던 날부터 그는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하늘의 신비라 했고, 어떤 이들은 무언의 벌이라 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침묵을 배워야 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너무 많은 말이 세상을 채우고 있을 때, 가장 깊은 변화는 말이 끊긴 자리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즈가리야는 사람들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고, 자신의 아내와도 오랜 시간 오직 눈빛과 손짓으로만 소통해야 했다. 아마도 그는 매일 아침 작은 서판에 짧은 문장을 적었을 것이다.
“오늘은 괜찮아?”
“걷다가 힘들지 않았어?”
“밤새 잘 잤어?”
그렇게 오가는 문장 사이에, 아버지가 되어가는 시간이 천천히 쌓였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집을 지켜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말이 없지만, 말보다 더 깊은 교감이 오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엘리사벳의 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사람들은 그 집에 가까이 가보지 않아도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은 금세 마을을 뒤덮었다. 어떤 이는 손을 덮어쓰고 울었고, 어떤 이는 이웃을 부르며 “그 집에서 기적이 일어났대”라고 소리쳤다.
그 기쁨은 어느 누구의 것이 아닌, 마을 전체의 것이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한 집안의 출산을 넘어선 일이었다. 기다림의 끝에서 만난 생명이었고, 오랜 침묵 끝에 다시 피어난 희망이었다.
며칠 뒤,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날이 되었다. 친척들과 이웃들이 모여들었고, 자연스럽게 “즈가리야라 하자”는 말들이 오갔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시대에 아들의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르는 게 관례였고, 그것이 익숙함과 질서를 상징하는 일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게 정답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단호했다.
“안됩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요한이에요.”
순간 사람들이 술렁였다. 그 이름은 그들의 기억에 없었다. 가족 중에도, 이웃 중에도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어떤 이는 “왜 굳이?”라고 속삭였고, 어떤 이는 그녀의 고집이라며 눈을 찡그렸다. 사람들은 즈가리야의 눈을 향했다. 대답을 기다렸다.
즈가리야는 작은 서판을 달라 했다. 그는 흔들리는 손으로 또박또박 글씨를 써 내려갔다.
“아기 이름 요한.”
그리고 그 순간,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아니, 열리는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침묵의 시간은 그렇게 끝났다. 그의 입이 열렸고, 마치 오랜 시간 숨을 참았던 사람이 한꺼번에 숨을 들이마시는 것처럼 그는 말을 쏟아냈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확고했고, 말보다도 먼저 그의 얼굴에 환한 빛이 번졌다고 했다.
그는 무언가를 노래했고, 사람들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가까워지는 느낌. 마치 그 순간만큼은 이 작은 마을 전체가 하느님의 손안에 놓인 듯한 느낌이었다고 누군가는 말해주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아이는 장차 어떤 사람이 될까…”
그 물음은 호기심이 아니라, 경외심이었다. 무엇인가 큰 흐름이 이 작은 아이를 통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 이름이 ‘요한’이라는 것은 단지 발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아이가 지금까지의 질서를 넘어 새로운 길을 걸어가리라는 예고였다.
나는 그날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지막 노트 한 페이지에 이렇게 적었다.
“하느님의 손이 그 아이와 함께 계셨다.”
이것은 단지 엘리사벳과 즈가리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누군가의 기다림, 침묵, 그리고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는 모두 그 길 위에 서 있다. 요한은 그 시작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오래도록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 감정을 느꼈다. ‘요한’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그것이 단지 누군가의 이름이라는 사실보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 것은 왜였을까. 아마도 그것이 누구의 뜻도 아닌, 누군가가 받아들인 뜻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가 가진 기대나 바람이 아니라, 자기 삶을 꿰뚫고 지나간 손길 앞에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사람들의 선택이었기에 더 깊이 다가왔다.
엘리사벳도, 즈가리야도 그저 어떤 전통을 지키는 데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하느님이 속삭인 낯선 길 앞에 귀를 기울였고, 침묵 끝에 꺼낸 그들의 대답은 “이 아이의 이름은 요한입니다”라는 말 한마디였다.
이름 하나를 다르게 부른다는 건, 때로는 세상이 그려놓은 선을 살짝 벗어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걸 받아들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용기가 없었다면, 즈가리야의 입도, 마을 사람들의 마음도,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혹시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군가의 삶을 듣고, 그 속에서 하느님의 손길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될 때,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히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내게도 있었던 건 아닐까. 누군가는 그걸 우연이라 하고, 또 누군가는 운명이라 말하겠지만, 나는 그냥… 누군가가 조용히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있다는 느낌이라 하고 싶다.
그 손이 있기에 누군가는 침묵 속에서도 희망을 키우고, 오랜 기다림 끝에서도 웃을 수 있고, 낯선 이름 하나 앞에서도 고개를 들 수 있는 것이다.
요한이 걸어갈 길이 어떤 길일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가 태어나던 날, 그의 이름을 부르던 사람들의 눈빛에서 나는 분명히 무언가를 느꼈다. 이름보다 앞선, 이름을 가능하게 했던 손길.
그 손은 지금도 우리 곁에 있는 걸까. 나는 여전히 답을 찾는 중이다. 다만 분명한 건, 그 손이 한 번이라도 당신의 어깨에 닿은 적이 있다면, 당신도 이미 그 길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이야기를 계속해서 따라가 보려 한다.
다음은, ‘예수’라는 이름이다.
위의 글은 신약 성경 "누가복음 1:55-66"을 각색해서 쓴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성경책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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