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세스 1세, 꿈을 이어 걷다
황량한 골짜기 사이로 길이 이어진다. 바람은 메마른 언덕을 핥듯 지나가고, 발밑의 자갈들은 부서진 별가루처럼 바스락거린다. 이곳은 왕가의 계곡. 한때 세상을 지배했던 이들의 마지막 꿈이 뿌리내린 땅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불모의 계곡은, 그러나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수천 년의 침묵을 넘어,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이름들이. 잊힌 손길들이. 지상과 저 너머를 잇는 희미한 숨결이. 저 멀리 낮게 움푹 꺼진 지형 너머, 작은 입구 하나가 보였다. 어떤 표식도, 장식도 없는 소박한 입구였다. 눈길조차 끌지 않을 만큼 검소한 그 틈이야말로, 오늘 내가 걸어야 할 시간의 문이었다.
입구를 넘자, 가파른 계단이 어둠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계단 양옆의 벽은 거칠게 다듬어진 석회암 그대로였다. 손으로 문지르면 금방이라도 가루가 일어날 것 같은, 메마른 벽. 그 벽은 황량한 계곡을 닮아 있었고, 계곡은 다시 그 벽을 닮아 있었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언젠가는 끝이 있을까. 나는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위를 올려다보니, 무덤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마치 삶이 뒤로 물러나고, 죽음이 서서히 다가오는 듯했다.
람세스 1세. 이 짧은 통로는 그 이름을 향한 여정이었다.
그는 이집트 제19왕조를 연 첫 번째 파라오였지만, 어쩌면 역사상 가장 덧없는 파라오 중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2년 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짧은 통치 속에서도, 그는 무너져가던 제국을 다시 일으키려는 꿈을 꾸었다.
람세스 1세는 원래 왕족이 아니었다. 평민 출신으로, 군사적 재능과 신관으로서의 경력을 통해 세티 1세의 아버지가 되었고, 끝내는 왕좌에 올랐다. 제18왕조가 막을 내리고 혼란이 이어지던 시기에, 그는 질서와 안정의 징표로 선택되었던 것이다.
그의 무덤은, 그래서 화려하지 않다. 거대하지도 않다. 다만, 그가 살아생전에 꾸었던 꿈처럼 단단하고 조용한 의지로 땅속에 자리하고 있다. 제18왕조와 19 왕조를 잇는 다리처럼, 허공에 떠 있는 다리 기둥처럼. 계단을 내려가면서 나는 몇 번이나 숨을 고르며 멈췄다. 내리막길은 가파르고, 공기는 묘하게 무거웠다. 벽을 가만히 만져본다.
지층처럼 켜켜이 쌓인 세월의 결. 손끝에 느껴지는 건 단순한 돌이 아니라, 수천 년 전 이곳을 깎아내던 장인들의 호흡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언젠가 이 길을 누군가가 다시 걸을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람세스 1세조차, 자신의 이름이 이렇게까지 희미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그것이 삶이다. 얼마나 높이 오르든, 얼마나 찬란히 빛나든, 결국은 이렇듯 한 줌 먼지로 스러지고야 만다.
계단 끝에서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등 뒤로 흐릿한 빛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빛은 먼 길을 따라, 왕가의 계곡 너머 황량한 언덕을 스치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저 언덕 위에서는, 한때 투탕카문이, 하트셉수트가, 세티 1세가 별처럼 빛났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모든 별들이 사라진 하늘 아래, 이름 없는 흙먼지처럼 서 있었다. 시간이란 벽을 걷는다는 것은, 그런 일이었다.
지워진 이름들 사이를 조심스레 지나며, 존재의 희미한 흔적을 더듬는 일. 그리고 그 끝에, 아직 지워지지 않은 어떤 숨결을 만나는 일. 나는 다시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람세스 1세가 남긴 짧은 꿈을 따라,
시간의 벽 너머로.
무거운 공기가 내 어깨를 짓눌렀다. 계단 끝, 다시 한번 좁은 문을 지나자 드디어 그가 잠든 방에 이르렀다. 앞에 펼쳐진 것은 놀랍도록 조용한 세계였다.
가운데 놓인 거대한 석관은, 먼지와 세월을 뒤집어쓴 채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붉은 사암으로 만든 이 석관은 다소 거칠고 투박했지만, 그 위에 새겨진 이름과 상형문자들은 여전히 왕의 위엄을 말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낮은 조명 아래서 석관을 스치는 손길 하나, 숨결 하나조차 무겁게 울렸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왕들은 이렇게 스러지고, 다만 이 무거운 석관 하나로 영원히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속삭이는 것일까.
람세스 1세.
그의 생애는, 이집트 역사에서 아주 짧은 한 줄에 불과했다. 원래 그는 아비도스 출신의 평민이었다. 이름은 파라메스(Paramessu). 오랜 세월 동안 신전의 사제직을 맡았고,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군대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제18왕조 말기, 아이(Ay)와 호렘헤브(Horemheb) 시대에 이집트는 왕권의 약화와 종교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당시 파라오는 강력한 군 지휘관과 충성스러운 신하를 필요로 했다. 파라메스는 그런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특히 호렘헤브의 신임을 얻어, 왕위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왕족의 피도 없고, 신이 내린 가문도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탁월한 판단력과 강력한 질서 회복 의지가 있었다.
이집트의 질서를 다시 세우려는 꿈.
그것이 바로 파라오 람세스 1세가 된 파라메스의 첫 번째, 그리고 마지막 꿈이었다.
매장실의 벽에 다가갔다.
벽화들은, 아직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했다.
짙은 붉은색, 금빛 노랑, 깊은 남색으로 채색된 인물들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벽 너머에서 걸어 나올 것 같았다. 한 벽면에는 죽은 왕을 이끌고 가는 신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뱀과 배, 그리고 망자를 인도하는 신들.
저 뱀은 혼돈과 죽음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 혼돈을 제압하고 저승의 바다를 건너는 배는 왕의 부활 여정을 상징했다. 람세스 1세는 짧은 통치 기간 동안 많은 것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질서와 신앙을 되살리려 했다.
그가 시작하고, 아들 세티 1세가 완성한 아비도스 신전은,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신앙의 끈을 다시 묶는 작업이었다.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자 했던 람세스 1세의 바람은, 이 조용한 매장실과 살아 숨 쉬는 벽화들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또 다른 벽면으로 옮겨 섰다.
거기에는 소를 이끄는 신들과, 머리에 뿔을 단 신들이 그려져 있었다. 부활과 풍요의 상징이었다. 왕의 영혼은 죽음 이후에도 신성한 소의 형상을 빌어 다시 태어나며, 질서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존재가 된다. 짧은 생애였지만, 그는 무너진 이집트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어 했다. 그 꿈은 아비도스 신전에 새겨진 ‘부활의 노래’와 이곳 무덤의 ‘생명의 벽화’에 함께 숨 쉬고 있었다.
벽화들은 계속 이어졌다.
여기에는 왕이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장면이 있었다.
호루스, 아누비스, 오시리스.
죽은 자를 심판하고 부활을 허락하는 신들이, 왕을 맞이하고 있었다. 람세스 1세는 이 세상에서 마무리하지 못한 자신의 과업을, 신들에게 맡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못 다 이룬 질서를, 신들의 질서 속에 다시 세워달라고.
한편으로는 두려웠을 것이다.
짧은 생애를 마감하며, 이 모든 것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며 얼마나 많은 밤을 기도했을까. 벽 한쪽 구석에서 나는 오래도록 발을 떼지 못했다.
거기에는 또다시 뱀과 여인들의 행렬이 그려져 있었다. 물결치는 물 위에 선 여신들은, 한 손으로 뱀을 제어하며 또 한 손으로 생명을 지켜내고 있었다. 혼돈 속에서도 생명의 줄기를 놓지 않으려는 몸짓. 왕이 꿈꾸었던 것도 바로 이런 세상이었을까.
무너진 신전, 죽어가는 나라, 흩어진 신앙 속에서도 그는 마지막까지 믿었다. 생명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질서는 다시 회복될 수 있다고. 나는 조용히 벽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도록 눈을 감았다.
람세스 1세.
이름만으로는 기억되지 않는 파라오. 그러나 삶과 죽음 사이, 질서와 혼돈 사이를 건너며, 짧은 생애 안에 긴 꿈을 심어 놓은 사람. 그는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꿈을 남겼다.
그 꿈은 세티 1세에게, 람세스 2세에게 이어졌고, 결국 이집트 제19왕조라는 찬란한 시대를 열게 했다.
짧은 생애.
그러나 결코 짧지 않았던 꿈. 나는 석관 앞으로 다시 걸어갔다. 붉은 사암에 새겨진 이름을 가만히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여기서 당신의 꿈을 보았습니다.”
방의 한쪽 벽, 다소 소박해 보이는 공간에 작은 벽화 하나가 있었다.
그림 속에는 신들이 죽은 왕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하얗게 감싸인 미라가 붉은 대지처럼 선명한 배경 위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그 곁에는 뿔 달린 신, 그리고 뱀을 형상화한 신이 왕의 부활을 돕고 있었다. 그림은 말이 없었지만, 그 몸짓들은 분명히 말했다.
"일어나라. 다시 시작하라."
나는 오랫동안 그 장면 앞에 머물렀다.
짧은 생애를 마감한 람세스 1세.
그러나 이 작고 소박한 부활 장면은, 그의 삶을 아주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반추하게 했다. 람세스 1세는 왕이 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생을 마감했다. 그의 무덤은 다른 파라오들의 화려한 무덤에 비하면 훨씬 소박하고 간결하다. 그럼에도, 그의 무덤에는 생명의 복원, 죽음을 넘어서는 질서,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의지가 가득 차 있었다.
아마 그는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걸었던 길이 얼마나 짧은지, 그리고 자신이 열어야 할 문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생애를 위한 길이 아니라, 이집트라는 거대한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길을 냈다.
제18왕조의 영광이 사그라든 폐허 위에서, 그는 새벽처럼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 짧은 발걸음 하나로, 그는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 뒤를 따라 아들 세티 1세, 그리고 손자 람세스 2세가 이집트 제국의 황금시대를 꽃피웠다.
나는 투탕카문을 떠올렸다.
짧은 생애, 짧은 재위.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에도 사람들은 투탕카문의 이름을 기억한다.
화려하고 정교한 무덤, 온전하게 발굴된 보물 덕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생각했다. 만약 기억의 무게를 보물이 아니라 ‘살아낸 꿈의 무게’로 잰다면, 람세스 1세 역시 결코 가벼운 존재는 아니라고.
투탕카문은 치열한 삶을 살기엔 너무 어린 나이에 죽었다. 반면, 람세스 1세는 살아오며 수많은 전장을 누비고, 신전의 종소리를 울리고, 권력의 복잡한 미로를 지나 결국 왕좌에 올랐다.
그가 짧게 남긴 꿈은 단지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쇠락하는 왕조를 다시 일으키려는, 나라를 위한 꿈이었다. 그리고 그 꿈은, 짧은 생애를 넘어, 세대와 세대를 건너 지금 이 벽화 속에서도 숨 쉬고 있었다.
나는 석관을 마지막으로 바라본 후,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깊고 긴 통로를 따라 다시 빛을 향해 걸어 나갔다. 돌계단을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오를 때마다 무거웠던 공기가 조금씩 가벼워졌다. 계단을 오를수록 살아 있는 세상의 숨결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계곡의 햇살 속으로 다시 나왔다. 거친 돌바닥 위에 서서 나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변함없이 푸르고, 냉정하게 먼 하늘이었다.
이 계곡을 지켜보았던 하늘.
람세스 1세가 무덤에 안길 때도, 투탕카문이 별이 될 때도, 이 하늘은 변함없이 그 위를 덮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이름이 기억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긴 생애를 사는 것이 중요한가, 짧은 시간 속에서도 무엇을 남기느냐가 중요한가.
람세스 1세는 오래 살지 못했다.
화려한 무덤도, 대규모의 기념비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미래를 여는 문을 열었다. 낡고 무너진 시대를 지나, 다시 세상을 일으키기 위한 작은 불꽃을 품었다. 그리고 그 불꽃은, 바람에 꺼지지 않고 누군가의 손에, 또 다른 이의 손에 옮겨 붙어 결국 하나의 큰 빛이 되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짧지만 빛났던 이름.
그가 남긴 짧은 숨결이, 지금 이곳까지 이어져 나를 멈춰 세웠다.
나는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언덕을 넘어, 모래 위를 걸으며.
시간은 흘러도, 이름은 스러져도, 그 짧은 꿈은 여전히 이 계곡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것 같았다.
마치, 먼지바람 속에 스치듯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처럼.
“다시 일어나라. 다시 꿈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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