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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그림자 아래에서

람세스 2세의 아들, 메렌프타의 무덤에서 부활을 묻다

by 나그네 한

경계의 문 앞에서 – 아버지의 이름, 아들의 무게


철망 너머, ‘KV8: Merenptah’라는 팻말이 조용히 시선을 붙잡았다. 낡은 철재 그물에 단단히 고정된 사인 하나. 별다른 장식도, 부연 설명도 없이, 오직 이름과 번호만이 그곳이 누구의 마지막 장소인지를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작은 표지판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문득, 저 문 뒤편에서 기다리는 시간의 밀도가 어떤 것일지, 그 안에 잠든 이름이 어떤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를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렌프타.

이름만 놓고 보면 다소 생소한 파라오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아버지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그의 삶을 둘러싼 모든 배경이 급격히 무겁고 조밀해진다. 그는 람세스 2세의 아들, 이집트 제19왕조의 계승자였다. 그러나 여기서 “계승자”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뉘앙스는 단순한 승계의 의미를 훨씬 뛰어넘는다. 그것은 '계승'이라는 말이 때로는 얼마나 무거운 그림자 속에 사람을 가둘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람세스 2세. 태양신 라와 동격의 위엄을 지녔다고 여겨졌던 파라오. 66년이라는 전무후무한 재위 기간 동안 그는 이집트의 신화적 정체성을 자신의 몸으로 구현한 존재였다. 그가 남긴 유산은 단지 건축물이나 전쟁 기록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 자체가 하나의 시대였고, 상징이었다. 아부심벨에 앉은 네 개의 거대한 석상. 룩소르 신전에 새겨진 무수한 카르투시와 서사. 그리고 카데시 전투의 일방적인 승전 기록까지. 그 모든 것들이 ‘람세스 시대’를 증명하고 있었다.


이제 그 아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메렌프타는 그 거인의 아들이었다. 그림자가 너무 커서 햇빛조차 가려지는 땅에 태어난 자.


그는 람세스 2세의 13번째 아들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왕위는 그의 차례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아버지보다 먼저 형제들을 데려갔다. 12명의 형들이 그보다 먼저 태어나 자라났고, 왕권의 후계자로 거론되었지만, 그 누구도 람세스 2세보다 오래 살지 못했다. 66년이라는 이례적인 재위 기간 동안, 메렌프타는 수많은 형들의 장례를 목격했을 것이다. 왕좌는 차례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남은 자에게로 가는 것임을, 그는 뼈저리게 배웠다.


그래서 그는 결국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의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 만든 결과였다.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 그는 늘 그림자에 가려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떠난 후, 그 길고 긴 줄의 마지막에 홀로 서 있던 그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선택받았다기보다, 선택지 없는 후계로 지명되었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찬란한 유산이 아니라, 정점 이후의 시간이었다.


메렌프타는 아버지 람세스가 90세를 넘겨 세상을 떠났을 무렵 겨우 왕좌에 올랐다. 이미 노년에 접어든 상태였고, 그가 받은 것은 권좌라기보다 숙제에 가까웠다. 아버지가 쌓아 올린 업적의 위를 다시 쌓기란 불가능했다. 이미 이집트는 전성기의 정점을 지나고 있었고, 그는 쇠락의 언덕길을 오르내리는 조정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더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그는 왕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새겼다. 카르낙 신전의 일부를 보수했고, 룩소르에도 석주를 세웠다.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리비아인과의 전투를 기록한 유명한 ‘메렌프타 승전비’에서 그는 자기 시대의 승리를 과감히 선전했고, 그 돌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이집트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다. 어쩌면 그 기록은 실제의 승전보다 ‘기억에 남기고 싶은 왕의 초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는 기억되기를, 새겨지기를, 단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자기 이름의 주인’으로 인정받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는 입구를 바라보며 그런 그의 마음을 천천히 짐작해 보았다. 사진 속 경사로는 침묵을 머금고 있었다.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방문객들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조명, 단단하게 붙은 손잡이, 그리고 벽에 촘촘히 새겨진 상형문자. 그 모두가 이 무덤이 단지 장례의 공간이 아니라, 의지의 공간, 말하자면 메렌프타가 자신만의 사후 세계를 위해 준비한 ‘무언의 선언문’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람세스 2세의 무덤은 오늘날 폐쇄되어 있어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다. 그에 반해, 메렌프타의 무덤은 이렇게 열려 있다. 묘하게도, 이 점이 그의 운명과도 닮아 있다. 아버지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존재였지만, 아들은 그 자신의 무덤에서마저 조용히 사람들을 받아들인다. 철망 문 너머로, 가파른 계단을 따라, 사람들은 그의 세계로 내려간다. 마치 파라오가 아닌 평범한 인간의 마지막 길을 함께 걷듯이.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 입구에서부터 이어지는 경로는 단순한 동선이 아니라 하강의 의례다. 메렌프타는 그 통로를 따라 신들의 세계로 스스로를 이끌었을 것이다. 계단은 그가 감히 아버지를 넘어서기 위해 선택한 내면의 길, 침묵의 여정, 그리고 죽음과 부활의 드라마로 연결되어 있었다. 천천히, 깊이, 조심스럽게. 아무도 없는 듯하지만 모든 신들이 지켜보고 있는 그 길로.


그 경계선에서 나는 그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한 듯했다. 질투와 경외, 포기와 집착, 절망과 신념이 한꺼번에 몸 안에서 부딪혔을 메렌프타. 그는 단지 왕이 되려 한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인정받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그것은 무덤의 시작부터 끝까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입구를 지나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자칼의 머리를 한 신, '아누비스(Anubis)'다. 그는 몸을 낮추고, 웅크린 채 침묵을 지키고 있다. 수천 년을 지나온 석벽 위에서조차, 그 존재는 또렷하다. 죽은 자를 저승의 심판대로 인도하는 자. 그 앞에 엎드린 자는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무릎을 꿇은 그 모습은 한 인간이 신 앞에서 남긴 마지막 자세처럼 보인다.


이 장면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이곳은 분명히 무덤의 입구다. 즉, 이곳에 아누비스가 새겨졌다는 것은, 이 길을 걷는 이가 더 이상 살아 있는 자가 아님을 스스로 인정하는 선언과 같다. 살아서의 이름도, 업적도, 파라오라는 칭호도 이 신 앞에서는 무의미해진다. 오직 ‘죽음 이후의 자격’만이 허락되는 그 입구에서, 메렌프타는 겸허히 머리를 숙였을 것이다.


아누비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침묵을 머금고 있다. 죽은 자의 영혼을 심판의 저울 앞까지 데려가는 신. 그를 마주하는 순간, 누구든 한 번쯤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누구였는가.” 메렌프타 역시 그 질문 앞에 섰을 것이다.


이러한 상징들 사이로, 나는 그가 남긴 이야기를 따라간다. 이름도, 권좌도, 신의 아들이라는 칭호도 결국은 하나의 문을 통과하기 위한 장치였을 뿐. 그 앞에서는 메렌프타 역시 두려움과 기대를 품은 한 사람이었다. 이제 나는 그의 계단 아래로 내려가려 한다. 그의 이름, 그의 무게, 그의 침묵을 따라, 다음 장면으로.






지하세계의 서사 – 신들과 마주한 왕


계단은 점점 어두워졌다. 세상의 빛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곳으로 내려갈수록, 나는 발끝으로 무게를 느껴야 했다. 무덤은 단지 지하에 위치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집트인들에게 사후 세계로 들어가는 하강의 문, 삶과 죽음, 시간과 영원을 연결하는 경계선이었다. 그 계단을 따라 내려갈 때 나는 문득, 이 공간이 단지 묘지나 유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서사 공간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첫 벽화는 화려했다. 그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파라오 메렌프타가 태양신 라(Ra) 앞에 서 있는 장면. 한쪽에는 태양 원반을 머리에 이고 있는 라, 반대쪽에는 메렌프타. 두 인물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파라오가 신 앞에 내밀고 있는 손, 그 손끝에 들린 작은 의식도구는 곧 메시지였다. “나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신과 마주한 인간. 그것도 신의 아들이라 불렸던 파라오가 다시 신 앞에 자신을 낮추는 장면이었다.


그 그림은 살아서 신의 대리인이었던 파라오가, 죽은 뒤에는 다시 신의 심판을 받아야 함을 말하고 있었다. 삶의 위엄은 무덤의 침묵 앞에서 다시 무너지고, 모든 권위는 사라지며, 남는 것은 단 하나, 그의 영혼이 얼마나 정결했는가라는 질문이다. 메렌프타는 그 질문 앞에 서 있다. 아버지의 권위도, 피로 맺은 혈통도, 금빛 관이나 장대한 신전도 이 문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오직 그 자신으로서 통과해야 할 의식이었고, 그는 그 장면을 벽에 새겨두었다.



이어지는 공간에서 나는 그보다 더 묵직한 시선을 느꼈다. 아누비스(Anubis). 자칼의 머리를 한 신. 죽은 사람의 영혼을 심판받는 자리까지 데려가는 이 신은, '언젠가는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였다. 아누비스는 말이 없다. 그는 언제나 그렇게 침묵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보고 있다. 메렌프타의 벽화에 등장하는 아누비스는 파라오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는다. 그는 옆을 본다. 어쩌면 그것은, 파라오조차 신 앞에서는 기다려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옆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벽에 새겨진 상형문자들 사이로 파라오의 숨죽인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나는 정의롭게 살았습니다. 나는 나일강을 배불리 채웠고, 성소를 복원했으며, 이방인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신은 아직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이 무덤의 그림은 그 응답을 기다리는 메렌프타의 마음, 다시 말해 심판을 앞두고 선 인간의 두려움과 기대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무덤을 두려움으로만 채우지는 않았다.



곧이어 펼쳐지는 장면은 사후 세계로의 여정을 그린 보트의 벽화였다. 신들의 배에 올라탄 자들, 줄지어 걷는 수많은 인간 형상들, 그리고 그 위에 빼곡히 새겨진 상형문자. 이 장면은 이집트 사후관의 핵심인 ‘밤의 항해’를 상징한다. 밤마다 태양신라는 저승의 강을 건너며 새벽에 다시 태어난다. 파라오는 이 여정에 동행한다. 그는 다시 빛을 보기 위해 어둠 속을 건너야만 한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벽화 속 인물들의 표정이 모두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살아 있는 이가 누구인지, 죽은 이가 누구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모두가 이 여정에 함께 선 이들이다. 이 장면은 일종의 통과의례다. 인간은 신들과 동행하며, 어둠과 맞서야 한다. 메렌프타는 그 여정을 완주하기 위해, 자신의 무덤에 이 긴 이야기를 새겨놓은 것이다.



한편, 다른 벽면에서 나타난 장면들 중에는 다소 낯선 상징들이 있었다. 긴 몸을 뻗은 뱀의 형상, 그 위에 선 인간들. 그리고 손을 든 사제들의 모습. 이는 고대 이집트의 ‘지하세계의 책(Book of the Underworld)’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으로, 사자의 밤을 통과하는 영혼의 여정 중 하나다. 뱀은 위협이자, 동시에 변형의 상징이다. 죽은 자는 그것을 넘어야만 한다. 그것을 피하지 않고 통과할 때만이, 다음 세상으로 이르게 된다.


나는 이 벽화들을 바라보며, 메렌프타가 왜 이처럼 복잡하고 풍부한 신화적 상징들로 무덤을 채웠는지를 생각했다. 그것은 단지 죽음을 두려워한 자의 몸부림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또 다른 형태로 기록하려는 파라오의 집념이었다. 어쩌면 그는 아버지 람세스 2세처럼 거대한 석상을 세우지 못할지 몰라도, 이 지하의 방들만큼은 자신만의 우주로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벽마다 서 있는 신들, 저마다 다른 머리와 손동작을 한 존재들 사이에서, 나는 어느새 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메렌프타는 그들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고, 동시에 감추고 있었다. 그리고 방문자인 우리는 그 벽을 마주한 채, 그의 마지막 기도와 자백, 변호와 침묵을 읽어야 했다.


이 모든 것은 단지 죽은 자의 공간이 아니라, 죽음 이후를 꿈꾸는 자의 연극무대였다. 무대는 조용하고, 관객은 없으며, 배우는 홀로 서 있다. 그러나 그 무대에는 천천히, 어떤 빛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다음 방, 더 깊은 곳. 나는 이제 석관의 방으로 향한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는 곳, 혹은 다시 시작되는 그 자리로.







다시 빛으로 – 석관 앞의 고요



내려가는 계단이 끝났을 때, 나는 마침내 멈춰 섰다. 숨이 가쁘게 차오르는 것도 아닌데,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뻐근하게 울려왔다. 어둠 속에서 길게 뻗은 석조 공간, 그 끝에 놓인 거대한 석관(sarcophagus) 하나. 기둥도 없고, 문도 닫히지 않았으며, 단단한 벽과 천장만이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 모든 소리가 여기서 멈췄고, 모든 시간도 여기서 숨을 죽였다.


그 석관은 단순한 돌덩어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시대의 마지막 침묵이자, 한 인간의 모든 것이 응축된 기호였다. 나는 그 앞에서 오래도록 걸음을 멈추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무언가를 말하기에는 이 공간의 침묵이 너무 완고했고, 그 침묵을 깨뜨리기에는 나의 존재가 너무 작고 부유했다.



사진으로 먼저 봤던 장면이 눈앞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정밀하게 조각된 화강암, 안에 잠든 자의 얼굴을 본뜬 곡선. 부서진 흔적들, 손상된 가장자리, 그러나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무게. 이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남겨진 것이었다. 메렌프타는 자신이 왕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석관을 남겼고, 그 속에 온몸을 뉘었을 것이다. 마치, 끝내 아버지의 무덤보다 더 완성된 사후 세계의 건축을 이룩하려는 마지막 시도처럼.


무덤의 벽면에는 여전히 상형문자가 이어지고 있었다. 오시리스가 팔을 벌리고 서 있고, 그 앞에 메렌프타가 서 있다. 그의 이름이 여전히 또렷하게 읽혔다. 오랜 세월을 지나도, 모래와 무게 속에서도, 그 이름은 돌보다 단단하게 버티고 있었다. 나는 그 이름을 천천히 읽었다. 메–렌–프–타. 그리고 다시. 마치 그가 여전히 내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남아 있는 것처럼.


석관 앞에 서 있는 내 그림자는 벽을 따라 조용히 퍼졌다. 나는 생각했다. 파라오의 무덤이라는 말은, 단지 왕족이 묻힌 무덤이라는 뜻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것은 삶의 무게가 극단으로 수렴된 공간, 인간이라는 존재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극복하고자 했는지를 응축한 형상이 아닐까. 그 무덤은 살아 있는 우리가 잊지 않도록 만드는 장치, 다시 말해 기억의 구조물인 것이다.


하지만 이 무덤에서 느껴지는 것은 단지 기억만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고독의 밀도였다. 아무리 위대한 왕도 죽음 앞에서는 혼자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누구와도 함께 갈 수 없었다. 파라오라는 지위도, 왕국의 사람들도, 거대한 신전도, 모든 것은 이곳에 들어올 수 없었다. 이 석관 하나, 그 안의 침묵 하나만이 그와 끝까지 함께한다. 그리고 그 침묵은, 어쩌면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끝까지 버텼노라. 나의 이름이 남게 하려 했노라.”


석관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그 공간에 앉아 있었다. 플래시도 터뜨리지 못한 어둠 속에서, 맨눈으로 겨우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거대한 돌덩이. 그러나 그것은 단지 석재가 아니었다. 그 무게에는 왕의 시간이, 왕의 이름이, 왕의 자존심이 눕혀 있었다.


세 방향에서 찍은 사진은 그 사실을 분명히 말해준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건 단지 사진이 담지 못한 ‘현장’의 무게다. 조명이 어슴푸레 비추던 그 방, 모든 구조가 하나의 중심—바로 석관—을 향해 모이고 있다는 느낌. 나는 그 안에 한참을 머물며, 숨을 고르듯 시간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이 공간은 죽음을 위해 설계된 곳이 아니라, 기억을 위한 공간이라는 것을.


이집트의 왕들은 부활을 믿었다. 그러나 그 부활은 단지 영혼의 여행이나 신들의 심판에 관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이 누군가의 입에서 다시 불릴 때, 자신의 얼굴이 벽화에서 다시 바라보일 때, 자신의 무게가 누군가의 가슴을 누를 때, 다시 살아난다고 믿었던 것 아닐까. 나도 모르게 석관 앞에서 숨을 멈추고 바라보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 믿음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그 중심에 있다. 단지 무덤의 중앙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바라보는 시선, 내가 멈추는 걸음, 내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의 중심에. 나는 돌 위에 앉아 물었다.


“부활은 무엇인가. 영원은 과연 어떤 감정인가.”


어쩌면, 메렌프타는 이런 순간을 원했던 것 아닐까. 누군가, 아주 먼 이방인이 그의 무덤을 찾아와 조용히 서서, 이름을 읽고, 눈을 마주치고, 생각을 건네는 순간. 그가 진정으로 살아나는 시간은 바로 지금... 나 안에서, 내 호흡과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끝내 아버지를 넘어서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가 열어놓지 못한 방,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은 침묵, 아버지가 남기지 못한 질문을 남겼다. 람세스는 위대한 건축물이었고, 메렌프타는 깊은 동굴이었다. 한 명은 모든 것을 보여주었고, 다른 한 명은 모든 것을 묻고 있었다.


출구를 향해 걸어 나오면서, 나는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무덤의 길고 긴 복도, 멀리 빛이 스며드는 입구. 나는 알았다. 이곳은 단지 사자의 잠든 곳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가 질문을 품고 돌아가는 곳임을. 메렌프타는 그 질문을 우리에게 남겼고, 그 질문은 그의 무게만큼이나 깊고 조용하다.


“왕이란, 죽은 뒤에도 누군가에게 이야기될 준비가 된 사람이다.”


메렌프타는 그런 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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