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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얄리 Oct 22. 2023

제8화. 내 몫 그리고 슬픔

계속 화를 내며

남편 탓을 할 수도 있었다.

남편은 죄인임을 자처했고

누구라도 남편을 욕할 것이기에.

얼마간 나는 잘못이 없고,

나는 피해자고, 나는 옳다는 단물을 빨며

씩씩 거리고 살았다.


그러다, 그렇게 내 인생을 낭비하면 안 되겠다는 자각이 서서히 일어났다.

내 몫의 책임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어려워하고 피하고 싶어 하는 건 뭐지?

내가 원하는 삶은 어떤 거지?


내 몫의 책임을 받아들이며

나 스스로에게 내 인생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하자

화가 눈에 띄게 줄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슬픔과 침울함이 차올랐다.


배드민턴 클럽에 가서 레슨을 받고

2시간 빡세게 땀을 흘리는 것 외에

하루의 나머지 시간을

의욕이 없는 상태로 꽤 오래 동안 지냈다.


그때 들었던 말 중에 제일 힘이 되었던 건

“고통 가운데에서 자기중심에 닻을 내리는 법을 배우고 있군요.”라는 S의 말이었다.


S는 내가 무기력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아무 것도 안하는 중에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걸 상기시켜주었다.

정말 그랬다.

나는 축 늘어져 있는 동시에

잘못된 선택들과 실패와 과오,

내가 상실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은 매우 능동적인 내적 움직임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온기와 따뜻한 눈빛,

그 눈빛 속에 담긴 관심,

관심에서 비롯된 질문과 대화,

깊은 이해와 공감으로 이루어진 소통,

소통에 이어진 세심한 돌봄,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경험들.

이것은

내가 받기를 간절히 바랬으나

받지 못한 모든 것들이다.


슬퍼해도 된다고 허용하자,

아랫배 저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던 슬픔이 불쑥 불쑥 올라왔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울고,

빨래를 개다가도 울고,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울고.

수도꼭지가 고장 난 듯

‘한 동안’ 눈물이 울컥울컥 쏟아졌다.



tip. 물건이나 사람에 투자한 감정적 에너지가 클수록 상실감이 크고, 많이 의존했을수록 박탈감이 크다. 애착대상, 의존대상을 잃으면 자신의 자아를 잃는 것, 자신의 중요한 부분을 잃은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운다고 뭐가 달라지나’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잘 울면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다. 감정을 억제하는 대신 올라오도록 허용하고, 애착하고 의존하던 것을 잃은 상실과 슬픔을 허용하고 흘려보내면 슬픔도 이내 바닥을 드러낸다. 잘 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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