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화를 내며
남편 탓을 할 수도 있었다.
남편은 죄인임을 자처했고
누구라도 남편을 욕할 것이기에.
얼마간 나는 잘못이 없고,
나는 피해자고, 나는 옳다는 단물을 빨며
씩씩 거리고 살았다.
그러다, 그렇게 내 인생을 낭비하면 안 되겠다는 자각이 서서히 일어났다.
내 몫의 책임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어려워하고 피하고 싶어 하는 건 뭐지?
내가 원하는 삶은 어떤 거지?
내 몫의 책임을 받아들이며
나 스스로에게 내 인생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하자
화가 눈에 띄게 줄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슬픔과 침울함이 차올랐다.
배드민턴 클럽에 가서 레슨을 받고
2시간 빡세게 땀을 흘리는 것 외에
하루의 나머지 시간을
의욕이 없는 상태로 꽤 오래 동안 지냈다.
그때 들었던 말 중에 제일 힘이 되었던 건
“고통 가운데에서 자기중심에 닻을 내리는 법을 배우고 있군요.”라는 S의 말이었다.
S는 내가 무기력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아무 것도 안하는 중에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걸 상기시켜주었다.
정말 그랬다.
나는 축 늘어져 있는 동시에
잘못된 선택들과 실패와 과오,
내가 상실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은 매우 능동적인 내적 움직임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온기와 따뜻한 눈빛,
그 눈빛 속에 담긴 관심,
관심에서 비롯된 질문과 대화,
깊은 이해와 공감으로 이루어진 소통,
소통에 이어진 세심한 돌봄,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경험들.
이것은
내가 받기를 간절히 바랬으나
받지 못한 모든 것들이다.
슬퍼해도 된다고 허용하자,
아랫배 저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던 슬픔이 불쑥 불쑥 올라왔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울고,
빨래를 개다가도 울고,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울고.
수도꼭지가 고장 난 듯
‘한 동안’ 눈물이 울컥울컥 쏟아졌다.
tip. 물건이나 사람에 투자한 감정적 에너지가 클수록 상실감이 크고, 많이 의존했을수록 박탈감이 크다. 애착대상, 의존대상을 잃으면 자신의 자아를 잃는 것, 자신의 중요한 부분을 잃은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운다고 뭐가 달라지나’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잘 울면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다. 감정을 억제하는 대신 올라오도록 허용하고, 애착하고 의존하던 것을 잃은 상실과 슬픔을 허용하고 흘려보내면 슬픔도 이내 바닥을 드러낸다. 잘 울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