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에요, 신부님.”
“또 일 년이 흘렀군요.” 아퀴나스 신부는 가볍게 목례를 하며 대답했다.
“그래도 수호 덕분에 일 년에 한 번은 보게 되네요.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할지.”
은이의 농담에 아퀴나스 신부는 웃지 않고 어깨만 으쓱했다.
“수호가 떠난 지 이제 3년이 흘렀으니 추모식이 계속 이어질지에 대해서는 장담 못하겠지요.”
“저는 몰라도 신부님은 가장 친한 친구인데 계속 추모해야 되지 않겠어요?”
“…그러면 자매님도 앞으로 계속 함께 하시죠. 딱히 바쁜 일도 없어 보이시는데.”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제가 지금 알바를 두 개나 하고 있기 때문에 굉장히 바쁜데 참석했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요즘은 무슨 알바를 하고 있죠?”
“편의점과 카페.”
“힘들겠군요.”
“대단히 힘들지는 않아요. 별다방 스케줄이 변동이라 편의점은 야간밖에 못하는 게 좀 힘들기는 하네요.”
“그건 대단하네요. 요즘은 글 안 써요?”
은이는 아퀴나스 신부의 말에 코로 흐흥 거리며 웃었다. 그렇지,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었지.
“쓸 시간이 없네요. 이미 쓴 것을 조금씩 고치고는 있는데.”
“오호. 나도 보여줘요.” 내내 안정된 저음을 유지하던 아퀴나스 신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별 내용 없어요. 누구랑 같이 볼 만한 소설이 되려나?”
“무슨 내용인데?” 아퀴나스 신부는 흥분하면 가끔 예전처럼 말을 놓고는 한다.
“글쎄… 친구 셋의 이야기이고, 그들 중 누구도 죽지 않고, 어른이 되어 가며 서서히 멀어지고 서로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는 그런 이야기?”
“아, 그래요?” 아퀴나스 신부가 턱을 손가락으로 몇 번씩 쓸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네, 뭐 별 거 없는 그런 이야기예요. 부자였던 친구는 잠시 일탈을 꿈꾸지만 이내 자신의 삶이 얼마나 축복받은 것인지 인지한 후 잘 나가는 유능한 변호사가 되고, 중산층이었던 친구는 사회부적응자로 살 뻔했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이 남겨준 부동산을 통해 자신이 평생 혐오하던 부동산 재테크의 혜택을 받아 그 역시 안정적인 중년이 되는 그런 얘기예요.”
“으음. 나머지 한 명은 어떻게 되는 그런 얘기인가요?”
“나머지 한 명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그냥 간신히 죽지 않고, 하지만 뭐 그런대로 지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평범하게 불안한 중년이 되지요.”
“…지가 하고 싶은 일? 글 쓰는 일?”
“네에, 뭐 그런 거?”
“말하자면 자전적인 이야기네요?” 아퀴나스 신부가 은이를 곁눈으로 내려다보며 물었다.
“꼭 그렇지도 않죠. 그러기에는 셋 다 삶의 궤적이 꽤 다르잖아요?”
사실 소설 속 은이의 삶은 ‘실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아퀴나스 신부는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렇긴 하죠. 아니다, 일단 읽어 보고 판단할게요. 그러니까 보여줘요.”
“고치는 중이니까 기다려요.”
“빨리 고쳐요. 요즘 속이 아파 와인도 못 마시고 다이어트하느라 디저트도 못 먹고 밤에 너무 심심하단 말이죠.”
“성직자들은 이게 문제야. 와인, 클래식, 커피가 없으면 인생에 낙이 없어.”
“누가 그렇답디까? 신의 은총만으로도 하루가 충만한데요.”
“무슨 신부님이 입만 열면 그렇게 앞뒤가 다른 말이 줄줄 나올까요?”
“미안합니다.”
은이는 한숨 쉬듯 웃고는 일어나 무덤가 잔디밭에 내려놨던 가방을 들어 낙엽을 털었다.
“내려갑시다. 신부님이 커피라도 한 잔 사주시겠지.”
“그럽시다, 그럼.” 아퀴나스 신부도 일어나서 비석을 한 번 손으로 쓸고는 성호를 긋고는 바로 떠날 것처럼 보였지만 은이가 기다리며 휘파람으로 노래 한 곡을 거의 다 불 때까지도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계속 올 수 있을까요?” 아퀴나스 신부가 비로소 비석에서 눈을 떼고 몸을 돌려 은이를 보며 물었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못 오는 것이겠죠.” 은이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니까.” 아퀴나스 신부가 혀를 차며 발걸음을 뗐다. “성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연락한 것이 은이씨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요. 냉정하긴.”
“아, 네… 성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의 내용을 다시 한번 읊어드려야 그런 말씀을 안 하시려나?” 이번에는 은이가 기가 막히다는 듯 반격했다. 아퀴나스 신부는 못 들은 척 발걸음을 크게 옮기기 시작했다. 은이가 뒤따르며 소리를 질렀다. “디저트도 사요!”
아퀴나스 신부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알았다는 신호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