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락이 끊긴 지난 몇 년 사이에 재석의 전화번호는 바뀌어 있었고, 바뀐 번호를 알아내기 위해 친하지는 않지만 몇 년 전 근무하던 출판사의 업무 관계로 번호를 저장해 놓았던 대학 선배 한 명에게 연락을 취해야만 했다. 선배는 내가 먼저 자신에게 전화를 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더니 재석의 전화번호를 아느냐는 물음에는 당황하는 눈치였다. 자신도 재석과 연락을 한지 오래됐지만 바뀐 전화번호를 알려주길래 저장을 했을 뿐이라면서 묻지도 않은 얘기를 중얼거렸다. 선배는 우리가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녀석에게 들었던 것 같다며, 왜 싸웠고, 왜 다시 연락을 취하려는 건지 굳이 묻지 않겠다는 말도 했다. 선배는 왜인지 지나치게 친절했고 나를 동정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시간강사로 고군분투하던 선배는 현재 원하던 대학의 전임강사로 자리를 잡았고 속한 학회에서도 선임 연구원이 되었다고, 묻지도 않은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 나는 짧게 축하를 전한 뒤 나 역시 썩 괜찮게 지내고 있다고 대답했다. 선배는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음에 밥 한 번 먹자고 말했다. 나는 쾌활하게 그거 좋은 생각이라고 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 너머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재석이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이 한참 울린 것 같았지만 녀석은 받지 않았다. 둘 중 하나다. 녀석이 내 전화번호를 저장해 놓았고, 내가 건 전화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받지 않았거나, 혹은 녀석이 내 전화번호를 저장해놓지 않았고, 모르는 사람의 번호이기 때문에 받지 않았거나. 혹은 받을 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마지막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나는 전화를 다시 하는 대신 그의 연락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약간 멍한 상태로 선배와의 대화와 전화를 받지 않는 재석에 대해 두서없이 생각하다가 집을 나섰다.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는 카페에 갈 시간이었다. 대부분의 카페가 어린 나이의 직원을 선호하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이 나이에 카페에 일자리를 구했다는 것이 거의 기적처럼 느껴질 정도다.
삼십 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인 카페 사장은, 동네 골목 어귀에 있는 카페 유리문에 ‘직원 구함’이라고 써붙인 것을 보고 무작정 들어간 내가 머뭇거리며 혹시 지원해도 되겠느냐고 묻자 무표정으로 이력서를 들고 와보라고 말했다. 나는 집에 돌아와 이력서 용지를 꺼내어 그간 해온 일들에 대해 빠짐없이 적었다. 대부분 카페와 관련이 없는 이력들이었다. 뽑아줄 리가 없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기왕에 쓴 이력서를 들고 다시 카페를 찾았다.
카페 사장은 이력서를 꼼꼼히 읽었다. 천천히 읽으며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살짝 두드리기도 했다. 나는 사장이 내어준 커피를 소리 내지 않고 한 모금 마셨다. 이윽고 그는 나의 이력 중 한 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신이 나를 아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2년가량 기자로 일했던 잡지의 구독자였던 사장은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던 나의 연재 칼럼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력서에 적힌 나의 이름과 잡지의 이름을 매칭시켜 본 결과, 그 칼럼을 쓴 기자가 자신 앞에 앉아서 면접을 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했다며 반가워했다.
사장은 그 칼럼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서 그 칼럼이 좋았다고 말했다. 종합해 보면 카페 사장은 기억력이 매우 좋은 사람이자, 이상한 칼럼을 좋아하는 취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사실 사장의 흔치 않은 취향은 그의 카페에서도 아주 잘 드러났다. 유행하는 인테리어와 메뉴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다른 무수한 카페와 달리 그 카페의 인테리어는 의도된 것인가 싶을 정도의 무심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카페에는 장식이랄 것이 별로 없었고, 그나마 벽에 장식으로 붙여놓은 태피스트리는 묘하게 수평이 어긋나 있었는데, 그 얇고 넓은 천의 귀퉁이는 셀로판테이프로 고정되어 있었다. 맨 처음 그것을 발견했을 때 그 철저한 무심함에 대한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카페에서 일한 지 한 달이 지난 지금은 그런 식의 구체적인 예시들을 얼마든지 들 수 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노인들에게만 판매하는 음료였다. 노인들이 즐겨 찾는 보리차와 인스턴트커피는 메뉴판에 적혀 있지도 않았다. 보리차는 그들이 앉은 테이블 가까운 곳에 비치해 놓아서 언제든 마실 수 있도록 했고, 노인들이 들어올 때마다 사장은 무심한 표정으로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믹스 커피, 이런 것이 아니라 커피와 설탕, 프림을 각 1:2:2로 스푼을 빠르게 놀려 컵에 담은 다음 끓는 물을 부으며 스푼을 빠르게 저어 섞었다. 문가에는 노인들이 지팡이를 걸 수 있는 우산꽂이가 항상 비치되어 있었다.
노인에 대한 태도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무심함과 세심함이 그토록 조화가 잘 된 사람도 드물었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다시 면접날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나의 칼럼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장의 말에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창간한 지 3년 만에 폐간된 인기 없는 잡지와, 그 잡지에 칼럼을 썼던 기자의 이름을 몇 년이 지나도록 기억하고 있는 것, 그리고 그걸 기억하는 사람이 운영하는 카페에 그 칼럼을 썼던 기자가 일을 하겠다며 찾아오는 일이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사장은 내 말에 동의하고는, 자신도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고 답하며 한 마디 덧붙였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이렇게 쓰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죠.”
“이렇게 쓰면 작위적인 설정이라고 욕먹을지도 몰라요.”
나도 모르게 흥이 나서 사장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사장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살짝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채용되었고, 아침부터 오후 세 시까지 일하는 사장의 바통을 이어받아 오후 한 시부터 많이 저녁 여덟 시까지 일하게 되었다.
카페에 도착한 나는 앞치마를 두르며 사장에게 이상한 일이 있었다고 슬쩍 언질을 주었다. 사장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호기심을 표했다.
나는 사장에게 옛 친구들인 재석과 성호, 그리고 그들을 참고로 해서 만든 인물들이 등장하는 나의 소설에 대해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