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출간했다고 해서 은이의 삶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아요. 돈은 적고 일은 많은 작은 회사들을 전전하다가 그마저도 모두 그만두고 난 후에는 대형 커피 프랜차이즈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게 되지요.”
“그렇군요.”
“그러다가 아퀴나스가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연락을 받게 돼요.”
“성직자가 되었나요?”
“네, ‘드디어’ 아퀴나스 사제가 된 것이죠.”
“흠. 귀국할 때 은이가 꽃 들고 공항에 나간다던가…?”
“설마요.”
“만나기는 하겠죠?”
“네.”
“수호도 함께?”
“아뇨. 셋이 다시 모이는 것은 수호가 죽고 나서의 일이에요.”
“한 명이 죽을 때까지 다시 모이는 일은 없는 거군요.”
“네.”
“수호는 왜 죽어요?”
“그게…”
나는 대답을 멈추고 침을 삼켰다. 사실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요. 지금처럼, 본인만 아는 이유로?”
“그렇군요.” 사장은 조금 실망한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하나 기억났어요. 수호는 죽기 전에 은이에게 문자를 보내요.”
“은이에게? 아퀴나스 신부가 아니고요?”
“네, 은이에게.”
“왜요?”
“그게… 나는 또 모른다고 대답하기 민망해서 머리를 쥐어짜 냈다 … 은이에게 무슨 말을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그때 파리에 가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했다?”
“에?”
“맞아요! 기억났어요. 그런 말을 해요. 은이에게 굳이 문자를 해서는, 그때 파리에 가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는 말을 남겨요. 그리고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죠.”
“수호는 어떻게 살고 있었는데요?”
“수호는 잘 살고 있었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남들이 보기에는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을 꾸리고, 아버지의 사업을 도우며 후계자의 자리를 굳히고… 뭐 그런 삶이요.”
“그런데 갑자기 그렇게 됐다고요?”
“음. 그랬던 것 같은데… 어쩌죠?”
“뭘 어째요? 작가가 그렇다면 그런 거죠.” 사장이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아아. 불쌍한 수호, 내가 미안하다! 아, 은이에게 아퀴나스 신부에 대한 얘기도 남겨요.”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요. 수호가 무슨 말을 했죠?”
“그게 기억이 안 나요.”
우리는 잠시 침묵 속에 서로를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이래서야 작가의 체면을 세우기란 불가능하다.
“성호도 수호도 비밀 속에 잠들었군요.” 사장이 침묵을 깨고 딱하다는 듯 말했다. 나는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합니다.”
“누구에게요?”
“글쎄요. 비밀 속에 잠들어 버린 모든 이에게?”
“흠. 그래도 다음번까지 좀 더 기억을 떠올려봐요. 어떻게 소설을 써놓고 원본 하나 안 남겨둘 수 있죠?”
“그때는 파일이 있으니까 언제든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파일을 저장해 놓은 하드가 통째로 날아갈 줄 꿈에도 생각 못했죠.”
“한 세상이 날아가 버리는 게 참 허무하군요.” 사장이 중얼거리더니 덧붙였다.
“우리는 그러지 맙시다.”
“네?”
“백업의 생활화, 이중삼중의 저장, 잊지 말도록 해요.” 사장이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사장님도 글을 쓰시나요?” 기회다 싶어 항상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사장은 웃으며 지체 없이 대답했다.
“자기는 소설을 백업하고 저는 매출기록을 백업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