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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생(來生)의 그대에게

어느 한순간의 기억이었을 테니.

by 적적

검은빛이 도는 색종이 한 장을 조심히 펼칩니다. 온전히 접혀야 할 부분의 선과 접혔다 다시 펼쳐져야 하는 실선들이 색종이 위에 가득합니다.

오늘도 늦잠을 잘 거라는 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큰 길가의 가로등은 한 땀 한 땀 절개된 선을 절취선입니다. 밤을 조심히 뜯어내고 있습니다. 발자국은 한결 느리고 걸음을 걸을 때마다 부드럽게 뜯겨나가며 부과된 금액을 드러내는 공과금 영수증 같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자르는 선들을 따라 걷다 보면 맑은 유리잔에 뜨거운 물을 붓고 홍차 티백을 담가두면 가라앉는 홍차 밭은 붉은 열기로 하늘이 밝아옵니다.


우려낸 하늘이 붉습니다.


체온보다 뜨거운 물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습니다. 욕실로 들어가기 전 전기난로 앞에 갈아입을 옷들을 놓아둡니다. 얼마 전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어릴 때 엄마는 늘 속옷들을 아랫목 이불속에 넣어두었다가 꺼내주곤 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니 엄마는 그랬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옷을 갈아입으며 느꼈을 한기가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제 나는 나만을 위해 물기를 닦고 나올 나를 위해 속옷을 데워둡니다.


일기예보보다 춥지 않은 수요일입니다.


다음 생에는 고양이로 태어나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나의 모란이라고 부르는 고양이를 키운 뒤부터 그런 생각을 간혹 하였습니다. 모란을 키우지 않았다면 추운 겨울의 아스팔트 위를 떠다니는 고양이로 태어나길 바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적은 양의 사료와 머그잔 반 컵의 물로 하루를 보내며 무릎에 앉아있거나 머리나 목덜미를 기분 좋게 만져주는 걸 즐기거나, 관심을 끌기 위해 탁자 위나 식탁 위의 물건을 떨어뜨리거나, 따스한 햇볕 아래 엎드려 잠이 들거나, 밖을 내다보며 하염없이 바라다보는 일. 물론 눈치 없이 장난스럽게 배를 어루만지는 일도 꾸욱 참고 있으면 잠시 뒤 멈출 테니 멈추지 않는다면야…. 손가락을 깨물어버리면 끝날 일이 될 테니.


도망치는 모란에게 소리 지릅니다. 다음 생엔 내가 너의 고양이로 태어나고 말 테다.


진한 쪽빛 한지 위로 먹이 번져갑니다. 한없이 영토를 덮쳐가며 번져갑니다. 겨울밤이 신호가 짙어지고 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고양이였던 나의 다음 생은 이미 펼쳐지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모란이란 이름의 고양이가 아..마…. 도..


곁에 누워 저토록 가만히 바라보는 걸 보며

모란이 나라면 나는 누구의 내생이었던 건지 생각하게 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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