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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이 두 번째였어

안개가 피어오른 날은 유난히 배가 고팠어.

by 적적 Jan 07. 2025

날씨가 흐린 게 아니라 너무 어둡다고 눈까지 침침해진 것 같다고 투덜거리며 출근을 했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구요. 작년까지만 해도 비가 오면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서 있었습니다.      


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비를 맞는 것이 편안했다는 말로는 늘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에겐 늘 설명하기 부족해서 그냥 젖은 옷을 털며 웃기만 했습니다.      


온종일 비가 왔습니다. 점심을 먹으러 가며 사무실 우산꽂이에 꽂혀있는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같은 우산을 펼치자 녹슨 우산 살이-이렇게 살 자를 붙이니 도화살이나 역마살이 떠오르기도 하지만-우산 천을 조금씩 파먹어서 쓰나 마나 우산이 되어 우산을 쓰고도 비를 맞으며 밥을 먹으러 갔습니다.     


비는 계속 오락가락하며 거세지거나 잦아들며 멈추지 않았고 퇴근 시간 무렵 잠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멈췄습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자 현기증과 한기가 번갈아 느껴졌습니다.     


라면을 끓여 먹어야 해     


그것은 아주 우발적이었으나 그날에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응급처방 같은 것이었습니다.

물을 끓이고 잘 익은 깍두기를 넣고 국물을 몇 숟가락 떠서 물을 끓입니다. 건더기 수프를 넣고 잠시 망설이다 스팸 뚜껑을 따고 있었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스팸을 꺼내려고 깡통 바닥을 두드리다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릅니다. 숟가락으로 스팸을 떠서 넣고 있었습니다. 반쯤 넣고 나자 겨우 정신이 들었습니다. 면을 넣고 젓가락질을 거칠게 하며 면이 풀어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양은 냄비 안으로 따스하고 진한 세계가 펼쳐집니다. 냉장고의 이제 막 익기 시작한 파김치를 꺼내 라면에 감싸 쥐고 보드랍고 뜨거운 분홍을 햄을 마구 삼켰습니다. 그리고 하나 남은 햇반은 내일 먹으려고 남겨두었는데 이미 전자레인지 앞을 서성이며 불빛이 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밥알 한 톨 남김없이 다 먹어버렸습니다. 기억으론 라면에 스팸 밥까지 다 먹은 건 태어나서 두 번째 일입니다.          

세상은 너무나 따스하고 모란의 털은 부드러웠으며 눈꺼풀은 무려 60kg쯤의 무게를 지녔습니다.     


죄책감 따윈 없습니다.     

포만감은 콜레스테롤을 내일 일로 미뤄둡니다.     

아니 생각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 밤      


세 번째 날은 이미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진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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