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은 그렇게 시작되었어요. 방수 처리된 오리털 파카 위로 팝핑캔디를 입안에 넣은 것처럼 조금 단단해진 빗방울이 옷 겉면에 닿아 터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아니 느껴졌죠. 제가 입은 검은색 파카의 혀끝에 닿은 눈송이들이 터지며 그 소리를 내곤 하였죠.
손등만 적시는 비가 왔어요.
얼마 전 다O소에서 샀던 책상 아래 붙여서 쓰는 작은 서랍은 서랍의 의무를 저버리고 그토록 넓은 양면테이프의 책임감은 사라지고 모란이 좋아하는 와이파이 옆으로 자리를 옮겼어요.
와이파이는 일 년 내내 같은 체온을 지녔지만, 겨울이 되면 그 같은 체온도 따스하게 느껴지는지 모란은 와이파이 위에 앉아 뭍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악명 높은 여 선장처럼 앉아있곤 하였어요.
모란은 밤마다 벽을 파내듯 단단히 붙어있던 플라스틱 서랍을 작은 숟가락으로 조금씩 틈을 벌려 신도 눈치채지 못하게 접착되어 있던 곳으로부터 서랍을 탈출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깊은 밤 접착면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던 간이 서랍은 바닥으로 떨어지며 바닥에 작은 금을 만듭니다. 놀란 고양이가 뛰어올라 이불속에 숨습니다. 너무 큰소리에도 깨지 못한 남자는 이불속을 파고드는 고양이를 다독입니다. 아침에 일어난 남자는 양면테이프 자리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더 이상 어디에도 견뎌낼 수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오늘 아침 견딜 수 없는 호기심을 달그락거리며 작은 서랍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선 깜짝 놀라게 했어요. 몇 번이고 모란을 다그치다 그냥 작은 서랍장을 바닥에 그냥 내려두었어요. 바닥에 내려두자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잠시 망설였죠.
산책을 다녀왔어요. 저기 보이는 작은 구멍으로 손을 넣어 서랍을 뒤집고 마침 뚜껑이 열려 있던 샤프심 통의 샤프심이 몽땅 쏟아져 내렸을 테고 태어나서 처음 보는 가늘고 검고 윤기 나며 손으로 잡히지 않는 그것을 부드러운 발바닥 젤리로 눌러 모두 두 동강을 내놓고 닿을 때마다 부서지는 그 매력적이고 은밀한 파괴감에 취해 남자가 온 줄도 모르고 열중하고 있었어요.
0.5mm 흑연의 세상은 종이에 한 번 닿아보지도 못할 거라 상상도 못 했을 겁니다. 고양이 발바닥에 의해 산산조각이 날 것은 꿈도 꾸지 못 할 일이었을 것입니다.
범인은 늘 범행 현장을 다시 찾는다는 말 알죠?
모란은 그사이 다시 현장에 찾아와 샤프심의 처참한 모습을 보기 위해 현장에 쳐진 바리케이드를 넘어서려 했으며 도저히 손으로 잡히지 않는 샤프심을 위해 바닥에 앉아 일일이 손끝에 침을 묻혀 한 조각 한 조각씩 샤프심을 치워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