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도 아직 눈이 녹지 않았죠?
드디어 오늘이 생각났어요.
사내는 오랜만에 뜨거운 물에 한동안 담가놓은 수건을 얼굴에 가만히 올려놓았어요. 특히 턱선을 따라 수건을 얹어 놓았죠. 살갗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져요. 평소 쓰지 않던 면도크림을 수염에 발라두는 거죠.
음…. 산타클로스처럼. 새로운 일회용 면도기를 꺼내 뜨거운 물에 가볍게 흔들어준 뒤 수염이 깎여 나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면도기 위로 면도크림이 체납되어 있으면 다시 물로 헹궈냈죠.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아래쪽에서 위로 아래쪽에서 위로 면도기를 잡고 있을 땐 입안으로 공기를 가볍게 채워줘야 해요. 더 이상 수염이 깎이는 소리가 나지 않을 때까지.
사내는 아들에게 좋은 아빠는 확실히 아니었을 거예요. 한번 확정된 관계는 좀처럼 바꿀 수 없는 일인 것 같아요. 그래도 처음으로 손주를 보는 자리에서 사내의 아들은 굳어진 표정으로 사내를 허락했으니 다행이라고 여기려고 생각했죠. 아니 고마움이 느껴지기까지 했어요.
잠든 손주가 눈을 떴으면 좋았으련만 사내는 그저 손주의 가늘고 긴 손가락을 바라봅니다. 벗겨놓은 양말을 만지작거립니다. 발을 살며시 손안에 쥐어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에.
재작년은 확실히 아니었을 테니 작년이었겠지 회사에서 직원용으로 제작한 탁상용 달력을 들춰보며
내년 설날엔 하루는 월차를 내고 마지막 날엔 연차를 당겨 쓰면 일주일을 쉴 수 있는 거네 이번 연휴는 너무 짧은 것 같아
일주일을 쉬면 얼마나 좋을까…. 난 온종일 신생아처럼 잠만 잘 거야. 스스로 기저귀를 갈고 이유식도 전투적인 신생아. 물론 비정상적으로 성욕이 뛰어난 아이라고도 불리겠지.
그날이 오늘이었습니다. 작년 달력을 들춰보며 행복했을 나는 이미 기름이 바닥이 났고 주차장에 세워둔 녹이 슬기 시작한 자동차 같았습니다.
이제 추운 것에 익숙해진 몸이 돼버린 아침입니다.
아직 햇살이 살갗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건너편 아파트 지붕엔 아직도 녹지 못한 눈들이 쌓여 있구요. 산책길에 눈이 오는 날 아이들이 한없이 만들어놓은 눈오리는 이제 더 추운 곳으로 날아가 버린 것 같습니다.
쉽게 녹아내리는 습성을 가진 철새들이 놓여 있던 자리를 어슬렁거립니다. 온종일 아이들은 아파트 화단이며 계단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한 곳에 모여 눈오리를 만들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아이가 눈을 퍼오라고 지시를 하면 다른 곳에선 눈오리를 만들고 그 오리를 조심히 날라 횡과 열을 맞춰 세웁니다.
눈오리 생산공장은 웃음소리가 가득했습니다. 눈발은 점점 더 거세지고 눈을 퍼 나르던 아이들이 하늘을 올려다보면 속력이 확연히 줄어듭니다. 금방 퍼온 눈은 눈오리 집게에 들어갔다가 더 이상 단단해지지 않습니다.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던 계집아이가 하트모양 집게를 들고 나오자 아이들의 대형이 일순간 흐트러집니다. 오리 모양을 하트모양으로 만들고 그 안에 오리를 집어넣기로 하자 하트 생산량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오리를 나르던 아이들이 하트를 만드는 아이 뒤로 길게 줄을 섭니다.
매번 오리를 나르던 아이에게 하트 집게를 넘기고 그 아이가 다시 하트 집게를 넘기고 누워있는 하트 모양 안으로 오리들이 주차장을 뒤덮습니다. 거대한 오리 철새도래지가 형성되었습니다.
지쳐버린 아이들이 집으로 하나둘 들어가 버립니다.
아이들이 밥을 먹고 다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시 내린 폭설로 하트 호수도 그 안의 오리 떼도 눈 위에 뒤덮여 버렸을 것입니다
웃음소리, 비둘기 발가락 같던 아이들의 붉은 손등, 도착 장소에 주차하는 차 안으로 이동 경로를 벗어났다고 경고를 알리다 꺼져버린 내비게이션.
타이어 자국이 남아있는 하트와 아직 오리가 되지 못한 채 쌓여있던 눈의 산맥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오리 곁을 어떡해야 하는지 모르는 어린 길고양이 한 마리
사진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