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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발톱.

어느 쪽이 더 빨리 시드는가?

by 적적


모든 날짜는 저마다의 계절을 배정받습니다. 각 계절은 달을 교육시키며 변하지 않는 습성을 지니도록 혹독하게 훈련시키죠.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루를 지내고 나자 어두운 겨울밤의 꿈같던 시간은 훨씬 더 멀어져 버린 기분이 드는 아침입니다.


그녀의 살갗을 입술에 머금습니다. 혀를 입안으로 삼킵니다. 그런 일련의 행동은 통증이 느껴지지 않도록 부드러워야 합니다. 간지러움은 가볍게 넘어서며 통증과 쾌락의 경계를 혼동하는 강도, 가벼운 웃음소리에서 한숨 같은 신음 사이.

헤어진 뒤 며칠 동안은 그날의 하루가 남게 되죠. 붉은 자국은 검게 변하고 다시 푸른빛을 띠다가 노을 지는 풍경이 되었다가 예전의 시간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아마도 사라질 것이 분명한 그곳을 손가락 끝으로 가만히 눌러보며 통증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우발적인 대화였어요.


발톱이 빠질 것 같아요


음…. 이번 생일에 빠진 발톱도 줄래요?


그래요…. 발톱을 뽑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웃었다 꽤 한참을 눈물이 나도록 웃었던 것 같다.


작은 코르크 마개가 있던 집게손가락 한마디만 한 작은 유리병 안에 오래전 건넨 마른 장미 꽃잎 사이로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발톱이 내게 있었어요. 흔들어보면 마른 장미 꽃잎 사이로 그녀의 발톱이 손을 흔들어 보였어요.


만화경을 흔들면 각기 빛을 따라 걷고 있는 사물들을 볼 수 있듯이 그 작을 병을 흔들면 그녀의 일부가 달그락거렸어요. 장미 꽃잎에선 눈 밟는 소리가 났었구요.


발톱은 어쩌면 엄마 자궁 안에서부터 가지고 태어난 커다란 연필 같은 건지도 몰라요. 평생 살갗 위로 자라난 끝을 잘라가며 걸어온 길마다 무언가를 쓰던 필기구처럼 말이죠.


결대로 조금씩 틈이 벌어지며 사그라듭니다. 가루처럼 부서지고 먼지처럼 나부끼게 됩니다. 장미가 시드는 시간처럼 그녀의 시간이 멈춘 연필은 유리병 안에 갇혀 사라집니다.


꽤 오랜 길을 걸었을 텐데. 먼지처럼 사라지는 일은 무척 쉬어 보였어요. 코르크 마개를 열지 못했죠. 비로소 뚜껑을 열자 유리병 속에 갇혀 있던 한숨이 일순간 뿜어져 나왔고 작은 종이에 싸서 어느 화단 아래 흙 속에 묻어주었어요.


유리병엔 작은 편지를 써서 바다에 던져버렸죠.

그걸 알게 되었습니다. 기억은 문신이라는 것.


때로는 서로의 멍 자국을 자랑처럼 내보일 수 있다는 건 기억이 잊히지 않았다는 증명이며 사라져도 머물렀던 자리를 되짚어볼 수 있다는 추억의 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서로의 몸에 내가 지나쳤던 순간을 기록하는 일.

차가운 아침은 더 차가운 아침을 예고하는데.


양철통은 모두 힘겹게 열어야 합니다. 열지 않았던 기간만큼 잠겨있었던 시간은, 녹이 슬고 그때마다 마지막으로 열었던 뚜껑의 안부는 어색하게 물어야 합니다.


코르크 마개가 헐거워진 유리병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립니다.

지금 보니 유리병 속으로 손가락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쩌다 손가락을 넣고 발톱과 꽃잎을 꺼냈다는 기억을 한 건지 의심스럽기까지 합니다.




겨울이 조금 느슨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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