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말이 떠오르기도 해.
토요일. 아쉬움으로 가득한 새벽의 기상과 잠시 흐릿한 정신으로 깨어있던 정오의 끈적이는 열기 속에서도 물에 흠뻑 젖은 신문지처럼 팔랑거리며 활자마다 기름 냄새가 납니다. 지지 않을 것처럼 밝던 햇살이 지고 나서야 휴일을 허투루 보냅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는 후회가 잠들 때 즈음 내일이 오지 않을 방법을 궁리하며 잠이 듭니다.
숨 쉬는 동안 기어코 월요일을 맞이할 것입니다. 근래 들어 가장 길게 쉬었던 연휴였습니다. 휴가보다 더 길게 보낸.
흐린 하늘도 괜찮습니다. 심술 맞게도 마음이 평온해지고 눈빛마저 따스해지는 게 느껴집니다. 본디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말이죠.
산책하러 나갑니다.
늦고 나른하며 느긋하고 한산한 거리를 걷습니다. 어제와 다르게 오늘은 손끝이 조금 따끔거립니다.
이제 막 잠든 아이를 침대에 눕히다 잠시 깨어난 아이의 가슴을 다독이는 지친 아빠처럼 한참 뒤에야 길을 걸으며 ‘보오옴 ’이라고 발음해 봅니다.
같은 층에 사는 사내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던 사내가 먼저 인사를 하며 말을 건넵니다. 낯선 사람과 인사를 하거나 대화를 하는 일이 달갑지 않아 이 많은 사람 중에 두세 명의 사람들과 인사를 합니다. 처음이 어려워서 그렇지 지금은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곤 합니다.
그 사내는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사내의 서사를 들은 건 3년 전쯤의 일이었습니다. 사내는 코로나로 일이 끊겼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마다 술병을 사 들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사내의 딸들은 인형처럼 예뻤습니다.
사내는 아주 오래전 막노동판을 전전하다 남미까지 가서 발전소를 짓는 일을 하던 중 자신보다 10살이나 어린 현지인을 만나 결혼하고 이곳에 정착한 지 꽤 오래되었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사내의 세 살짜리 막내딸은 눈이 컸습니다. 눈이 컸다는 말을 그 작은 얼굴에 눈만 있는 아이 같았습니다. 아이 이름은 윤 심이었습니다. 두 딸은 외국에서 태어났으니 외국 이름이라 부르기 직전에 자꾸만 잊어버렸습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사내의 아내와 손을 잡은 여자아이는 금발 머리를 양 갈래로 땋고 서 있는 나를 바라다보며 한 손으로 손가락 세 개를 만들더니 무어라 계속 얘기를 하였습니다.
세 살이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입니다.
윤기 나는 금발 머리에 하얀 피부, 커다란 눈을 보면 이름을 물을 수밖에. 또박또박한 발음에 나이를 물을 수밖에. 아이는 귀찮을 수밖에
윤시미 윤시미 윤시미
손가락을 펴서 나이를 알려주고 이름을 말하였습니다.
어느 날 일 층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 가만히 옆에 서 있던 아이는 닫히려던 문을 열어젖히는 남자를 보고 놀라 내 손을 힘껏 잡으며 제 뒤로 숨어 버렸습니다. 그토록 작은 손은 상상도 못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늦게 엘리베이터에 들어온 남자는 6층에 사는 헬스트레이너였습니다. 이 추운 날 무릎 위로 올라온 반바지를 입고 가슴근육과 등 근육이 엄청나게 발달해서 보는 순간 겨울잠을 자야 하는 거 아닌가 했는데
코뿌-ㄹ또 코뿔-ㄹ또
라고 크게 소리쳤습니다.
남자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웃고 있는 남자를 보자 윤심이는 기쁜 얼굴로 더 크게 소리를 질렀고 저는 윤심이를 진정시켰습니다.
엄마와 함께 브라질로 떠난 윤심이가 아빠에게 며칠 전 돌아왔습니다. 떠날 땐 아기였는데 지금 보니 얼굴은 더 작아졌고 눈은 더 커진 것 같았습니다. 언니들과 함께 깔깔거리며 웃느라 그 큰 눈이 사라지곤 하였습니다.
담배를 물고 건널목에 서 있던 저와 마주친 윤심이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며 OO 삼촌이라고 큰 소리로 불러주었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멀리 떠났던 사람이 겨울에 돌아오는 일은 체온을 나눠 몸을 데우는 일입니다. 매일 소주를 마시던 사내의 중독 증세를 멈추는 일이기도 합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 환한 불빛 아래서 윤심이 볼에 난 깊은 손톱자국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손톱자국인지 알지도 못한 채 속이 상했습니다.
그 작던 손을 떠올리며 고개 들어 천장을 바라다보았습니다.
주책스러운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