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견딘 무리로 하루가 간다.
지하철역 승강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늘 멜로디보다 리듬이 먼저 들린다. 스피커의 울림은 가사보다 박자를 강조하고, 그 안에서 한 아이는 귀를 막는다. 귀를 막아도 리듬은 몸속으로 들어온다. 울리는 뼈와 가슴, 텅 빈 흉강이 악기가 되는 시간. 어제도 들은 음악인데, 오늘은 다르게 들린다. 다르다는 말은 새롭다는 뜻이 아니라 어딘가 무너졌다는 뜻에 가깝다.
모두 무리해서 하루를 보낸 것이다. 얼굴은 멀쩡하지만, 발끝은 이미 붕괴되어 있다. 붕괴는 언제나 아래에서부터 시작되며, 누구도 자신의 발끝을 오래 내려다보지 않는다. 그렇게 사람들은 무너지기 전에 조금씩 기울어 있는 것이다. 거울은 상반신만을 비춘다. 엘리베이터 안 거울도, 백화점 화장실의 거울도, 모두 그 아래의 피로를 삭제하고 있다.
편의점의 불빛 아래에서 정체 모를 군것질을 집어 드는 손. 견디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확히 계산된 영양소가 아니다. 단순당, 인공색소, 조악한 포장지. 이런 것들이 유일한 위로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위로는 언제나 의외의 경로를 통해 도착한다. 식욕은 슬픔의 언어다. 말을 잃은 이들은 손으로 집고, 씹고, 삼킨다. 그것이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처럼.
낮 동안 견뎌온 것들을 각자 다른 방식으로 상쇄하려는 사람들. 어떤 이는 새벽 2시에 샤워기를 틀고, 어떤 이는 빈방에 라디오를 튼다. 물의 소리나 음악의 음색이 공간의 침묵을 가릴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침묵은 더 깊은 곳에서 떠오른다. 전원이 꺼진 스피커보다, 재생이 멈춘 라디오보다 더 조용한 곳에서 기어이 고개를 든다.
사람들은 감정이 무너지는 것을 피로라고 부른다. 하지만 피로는 감정의 침묵이다. 감정이 무너지기 전, 신체가 먼저 꺼진다. 감정을 지탱하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몸의 생생한 감각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울지 않는 사람들은 오히려 지쳐 있다. 눈물이 마른자리에 뜨거운 한기가 감돈다. 말하지 않는 것은 잊은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출근길 횡단보도에서 아무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서로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지우고 싶어 한다. 바쁜 것이 아니라 무거운 것이다. 고개를 숙인 이들의 어깨는 짐이 아니라 무게에 눌려 있다. 그 무게는 누구도 측정할 수 없다. 무게는 숫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억, 불안, 관계, 혹은 그냥 오래된 꿈같은 것이다. 깨어나지 못한 채 하루를 견디는 이들에게, 아침은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또 한 번의 반복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고개를 떨구는 사람들. 졸음은 탈출이 아니라 항복이다. 눈꺼풀이 감기는 것은 스스로를 지우는 방식 중 하나다. 온전하게 깨어 있기에는 세계가 너무 빠르다. 너무 시끄럽고, 너무 가볍고, 동시에 너무 무겁다. 감정은 손쓸 새 없이 밀려오고, 어제는 오늘을 침식하며, 내일은 끝없이 뒤로 밀린다. 그런 날들이 이어질수록, 한 사람의 ‘하루’는 점점 해석 불가능한 언어가 되어간다.
커피 두 잔, 진통제 한 알, 파스는 떼어내는 순간이 더 곤란하고, 새벽까지 켜진 휴대폰 화면. 그것으로 하루가 지탱된다는 사실은 기적이 아니라 재난에 가깝다. 무리라는 단어는 겉보기에만 강렬하다. 실은 비명을 말로 바꾸는 기술이다. 무리라는 이름으로 감내한 것들은 사실 고통이다. 고통을 외면한 대가로 피로는 되돌아온다. 침묵하는 몸, 말이 없는 마음, 무감한 얼굴. 그것이 사회가 선호하는 '견딤'의 얼굴이다.
누구도 그 하루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화는 점점 줄고, 표정은 정형화된다. 웃음은 인사처럼 남용되고, 분노는 고개 숙인 채 속으로 삼켜진다. 그런 나날들 속에서 사람들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조용히 스스로를 놓아버린다. 놓아버림은 해방이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잡고 있을 힘이 남지 않았다는 신호다. 손을 놓은 자리엔 공백이 생기고, 그 공백을 대체하는 것은 반복된 일상뿐이다. 같은 커튼, 같은 컵, 같은 잠자리. 그 안에서 모든 감정은 천천히 무기력으로 침전된다.
누군가는 기꺼이 무리를 선택한다. 그것은 생존 전략이다. 지하철 두 칸을 더 걸어가 자리에 앉고, 점심시간을 줄여 자격증 강의를 듣는다. 그 모든 선택 뒤에는 질문이 없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침묵이 자리한다. 그리고 그 침묵은 서서히 한 사람의 얼굴을 바꾸어 놓는다. 말하던 입이 닫히고, 바라보던 눈이 흐려진다. 표정이 사라지고, 동공이 고요해진다. 무리한 하루는 얼굴에서 먼저 흔적을 남긴다.
모두 무리해서 하루를 보낸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아무도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대신 서로에게 "오늘도 수고했어요"라고 말한다.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확인이다. 살아남았다는 확인. 완주했다는 선언. 하지만 그 완주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누적된 피로는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은 행동을 바꾼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감각을 지우는 일이다. 감각이 지워진 곳엔, 언젠가 되돌릴 수 없는 단절이 남는다.
무리한 하루 끝에 맞이하는 밤은 늘 가짜 같다. 조용하지만 평온하지 않고, 어둡지만 차분하지 않다. 잠은 쉼이 아니라 도피이고, 꿈은 무너진 현실의 재편성이다. 누군가는 꿈에서조차 달린다. 누군가는 그 안에서도 지각을 하고, 누군가는 말하지 못한 말을 반복한다. 그런 꿈에서 깨어난 새벽, 창문 너머는 여전히 흐리고, 시계는 또다시 7시를 가리킨다. 시작이 아니라 연장선. 새로움이 아니라 반복. 그렇게 사람들은 다시 무리하기 위해 준비한다.
다들 말한다. 살아야 하니까. 그 말속에는 너무 많은 생략이 들어 있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언제까지. 그런 질문들은 어느새 사라졌다. 질문을 포기한 자리엔 업무가 있고, 통장 잔고가 있으며, 반복되는 송금 내역과 고지서가 있다. 모두가 무엇인가를 감내하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웃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감내는 고요한 싸움이다. 소리 없는 파열음이 들리는 순간, 이미 오래전부터 금이 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간혹 아무 일도 없는 하루가 가장 고된 하루가 된다. 아무 일도 없다는 말은 아무 감각도 남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웃지 않았고, 울지 않았고, 놀라지 않았고, 감탄하지도 않았다. 단지 견뎠을 뿐. 그런 하루가 반복될수록, 한 사람의 내면은 조용히 비어 간다. 공허는 텅 빈 것이 아니라 과도한 감정이 쌓이다 쏟아져버린 자리에 남는 것이다.
모두 무리해서 하루를 보낸 것이다.
그것이 매일같이 계속되고 있다. 붕괴는 빠르지 않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견딘다는 말이 더는 미덕이 아니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어쩌면 비로소 진짜 말문을 열게 될지도 모른다. 그 첫마디는 이렇게 시작될 것이다.
다들...... 너..무 무.리.했.어.요.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