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24화

섬세한 것이 오래 남는다.

존재는 방식으로 감정은 결로

by 적적

빛은 오래된 카펫 위로 조용히 흘러내렸다. 담황색이 감도는 오후의 햇살은 마치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침묵의 표면을 어루만지는 손길처럼, 느리고 조용한 결을 따라 창틀의 그림자를 방 안으로 스며들 듯이 끌어왔다. 벽지에는 시간이 무늬처럼 박혀 있었고, 그 위를 더듬는 시선은 먼지의 결을 따라 천천히 감각을 되살려가는 듯했다. 방에 들어서는 일은 하나의 의식에 가까웠다. 발끝을 들고, 호흡을 가볍게 천천히 들이쉬며, 공기 속의 체온과 냄새, 무게를 온몸으로 감지하는 일. 단단한 고요가 집 전체에 침전되어 있었고, 그것은 마치 무게를 지닌 시간처럼 공간의 가장자리부터 천천히 번져나갔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감각이 있다. 미묘하고 고급스러운 것들. 그것은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자세이자, 주목받기를 거절하는 태도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불투명한 취향이라 말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감정의 금싸라기 라 불렀다. 이름이 붙지 않는 것들이 가장 오래 남는다는 사실. 정확히 무엇이라 정의할 수 없지만, 사라졌을 때 비로소 그 존재를 알아차리게 되는 감각. 이를테면 어떤 사람의 말끝에서 번지는 부드러운 울림, 고요한 오후에 천천히 퍼지는 홍차의 향, 손끝에 전해지는 섬세한 떨림 같은 것들. 그것들은 언어 이전의 감각이며, 감정 이후의 침묵이다.



사람들은 종종 과장된 감각을 진심이라 오해한다. 반짝임을 진정성으로 착각하고, 모든 감정은 껍질 없이 드러나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진짜는 늘 숨어 있다. 진짜는 설명하지 않는다. 벽장 속 오래된 코트처럼, 양장본의 누렇게 변색된 페이지처럼, 누군가에게는 의미 없는 낡은 물건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침묵보다 깊은 기억을 불러오는 사물. 고급스러움은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무게이며,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여백의 품격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조용함에 대한 존중이자, 무언의 언어에 대한 신뢰다.



미묘함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태도다. 억지로 웃지 않고, 과장된 손짓 없이도 충분히 다정한, 그러나 함부로 닿을 수 없는 거리. 한 걸음 앞에서 멈추는 예의, 눈을 맞추되 응시하지 않는 시선, 말없이 동의하는 고개 끄덕임. 중심에 이르지 않고 그 주변을 천천히 맴도는 감정. 그런 것이 공간 안에 있을 때, 공기는 더 이상 기능이 아니라 분위기로 변한다. 소리가 울리기 전에 먼저 울림이 도착하고, 존재가 감지되기 전에 먼저 분위기가 도달한다.



빛에 따라 달라지고 방향을 바꾸지만, 결코 없어지지 않는 존재. 어쩌면 진심은 늘 주변부에 머무르며 조용히 중심을 끌어당긴다. 그리고 그 조용한 인력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 한 사람을 오래 기억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크게 웃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조용히 사라졌는가에 달려 있다. 순간의 강렬함보다 지속적인 여운. 그것이 진짜 고급스러움이다. 오래된 클래식의 멜로디처럼, 입안에서 천천히 녹는 다크 초콜릿처럼, 한 문장으로 페이지를 덮게 만드는 소설의 구절처럼. 그들은 쉽게 다가오지 않고, 그래서 오래 남는다. 시간의 무게를 견뎌야만 도달할 수 있는 감각. 그들은 본질적으로 기다림과 연관되어 있다. 급한 이에게는 결코 닿지 않는 언어. 속도를 내는 것이 아니라 속도를 견디는 감각만이 그것에 닿는다.



고급스러움은 비싼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감정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매만진 것들.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의 뉘앙스, 가슴 깊은 곳에 쌓인 기억의 입자. 그런 것들이 쌓이고 침전되어 깊이가 된다. 그것은 브랜드가 아니라 태도, 장식이 아니라 균형, 과시가 아니라 은유다. 그래서 미묘한 것은 늘 고급스럽고, 고급스러운 것은 대개 미묘하다. 보이지 않는 힘이 존재를 지탱하듯, 가장 강한 것은 대개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방 한가운데 놓인 유리병 하나. 물도 담기지 않은 빈 병. 그러나 오후의 빛이 병을 통과하며 내부의 벽면에 생긴 그림자가 바닥에 반사될 때, 방은 일시적으로 고요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많은 것을 말하는 방식. 빛과 유리와 그림자가 합쳐져서 비로소 의미가 되는 순간. 침묵이 어쩌면 가장 명확한 언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장면. 비어 있었던 그 병 속에서, 세상은 다시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던 곳에서 모든 것이 생겨났던 기억.


사람들은 갈수록 명확한 것을 원한다. 이해 가능한 감정, 증명 가능한 관계, 효율적인 대화.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은 언제나 흐릿하고 모호한 장면에서 태어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 정의되지 않은 온기, 문장 바깥에서 오는 울림. 그런 것들이 삶을 구성한다. 익숙함과 낯섦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감각. 이름 붙이지 못했기에 오히려 더 정확히 기억되는 감정들. 그런 것들이 진짜다. 그런 감정만이 우리를 끝까지 데려간다.


고급스러운 사람은 말이 적다. 그들은 듣는다. 듣는다는 것은 단지 소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의 결을 감지하는 일이다. 누군가 하지 않은 말의 빈틈을 읽고, 지워진 문장의 흔적을 되살리는 일. 그래서 고급스러운 감정은 늘 섬세하고, 섬세한 감정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흘러나오는 음악보다 더 조용한, 그러나 더 깊이 파고드는 리듬. 존재감이 아니라 존재 방식. 그 방식이 곧 그 사람을 설명한다.



이름을 부르지 않고도 전해지는 마음, 메시지를 남기지 않고도 남겨지는 존재, 선물을 주지 않고도 느껴지는 감정. 그것이 진짜다. 그런 것들은 가시화되지 않지만 뚜렷하게 인식된다. 누군가는 모르고 지나치고, 누군가는 평생 마음속에 간직한다. 그것은 얇은 비단 같은 감정이다. 빛에 따라 색이 달라지고, 손끝에 따라 온도가 달라지며, 어느 방향으로 접히느냐에 따라 울림이 다르게 번진다. 감정은 결국 면의 질감처럼, 닿아본 사람만이 그 온도를 기억하게 된다.



결국, 삶은 과시할 수 없는 것들로 채워진다. 장식 없는 문장, 침묵 속의 감정,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같은 위로. 고급스러움은 단순한 것을 극도로 밀도 있게 느끼는 감각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미묘한 마음에서 출발한다. 누구에게도 쉽게 보이지 않는 결, 누구도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태도. 그런 것들이 모여 한 사람의 정체성을 이룬다. 그런 존재 앞에서 말은 줄어들고, 시간이 느려지고, 공기는 가라앉는다.



가장 미묘한 것이 가장 오래 남는다. 가장 고급스러운 것은 가장 조용하고, 가장 조용한 것이 가장 깊다. 그것들은 설명되지 않지만, 가장 가까이에 머문다. 빛보다 느리게 도달하는 이해, 소리보다 먼저 다가오는 감정. 그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다가와 속삭인다.



이것이 진짜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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