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고 싶지 않은 문장이 되는 것들.
우울감은 어쩌면 개인적이고 가장 특별한 세계다.
서랍 속에는 오래전에 말라붙은 잉크가 있다. 뚜껑을 닫지 못한 채 마른 그것은, 글쓰기를 기다리다 끝내 포기당 한 문장의 시신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고정시키려다 실패한 시도. 아무리 흔들어도 다시 흐르지 않는 감정처럼. 어느 문장은 쓰이지 못하고 잊히며, 어느 감정은 표백되듯 망각 속에 서서히 희미해진다. 우울은 그 경계에 앉는다. 망각과 창작 사이에 놓인, 지극히 불분명한 실루엣으로.
어떤 날은 종이 위에 단어들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문장은 굳어 있고, 의미는 지연되고, 시간은 무의미하게 흘러간다. 차가운 커피잔을 움켜쥔 채 고요하게 부유하는 한낮의 공기처럼, 글쓰기는 정지된 순간에 갇힌다. 우울은 언제나 조용히 다가온다. 그 소리 없는 틈입은 너무 완벽해서 알아차리는 순간에는 이미 전부 잠식당한 뒤다. 활자가 사라지고, 생각은 얼어붙는다. 그 속에서 문장은 기침처럼 간헐적으로 터진다. 아프지도 않고, 시원하지도 않은 기침. 그저 증상일 뿐인 글쓰기가 계속된다.
우울은 때때로 언어를 예민하게 만든다. 사물의 그림자가 더 길어지고, 물의 표면이 더 짙게 보이며, 무표정한 얼굴 속의 미세한 떨림까지 문장으로 포착된다. 바람의 흐름에 따라 문장의 구조가 바뀌고, 문단의 배열에 따라 감정의 온도가 달라진다. 우울은 세계를 새롭게 편집하는 렌즈다. 원래 존재하던 세계가 아니라, 감각을 통해 다시 조립된 세계. 그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낯설고, 동시에 더 정확해진다. 잊고 있던 비의 냄새, 무너진 자갈길의 불안정한 질감, 조용한 방 안에서 울리는 냉장고의 진동음까지—모두가 문장이 될 준비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생존이다.
글을 쓰는 이의 시간은 대체로 타인의 시간과 어긋나 있다. 어긋난다는 것은 반드시 늦거나 빠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같은 시계 속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고 있다는 뜻에 가깝다. 그 어긋남은 우울과 닮아 있다. 늘 중심에서 비켜 있고, 늘 정답과는 먼 어딘가에서 맴돈다. 사람들은 종종 그 어긋남을 ‘감수성’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실은 그것은 지속적인 단절의 산물이다. 세상의 언어와 조율되지 못한 채, 혼자 울리는 음표. 그 불협화음이 문장이 된다. 우울은 그 불협화음을 증폭시킨다. 일상적인 사물조차도 비정상적인 각도로 바라보게 만든다.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 해부하고, 평범한 얼굴 위에서 슬픔의 흔적을 찾아낸다.
그럼에도 글쓰기는 계속된다. 우울 속에서도, 오히려 우울 덕분에. 어떤 문장들은 스스로 존재 이유를 가진다. 그것은 기원의 문장이 아니라 결과의 문장이다. 비가 내린 후에야 냄새가 피어나듯, 감정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침묵이 종종 더 큰 언어가 된다. 우울은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그 잔향으로 문장을 밀어낸다. 직접적으로 슬픔을 묘사하기보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의 온도를 기록하는 식으로. 그 모호함 속에서 글은 깊어진다.
어떤 이들은 묻는다.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왜 쓰느냐고. 우울이 글을 망가뜨리는 건 아닐까, 그 문장들은 너무 어둡고 무겁다고. 그러나 우울이 없는 문장은 너무 빨리 증발한다. 지나친 명랑은 오래가지 못하고, 낙관은 단어의 질감을 흐린다. 우울이란 단지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정면에서 응시한 자만이 감당할 수 있는 밀도다. 그 밀도는 글을 뿌리부터 붙잡고 있는 힘이다. 쉽게 흔들리지 않는 문장, 쉽게 잊히지 않는 의미. 그런 것들은 대부분 우울의 그림자 아래서 태어난다.
글을 쓰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기억하기’와 ‘되살리기’의 반복이다. 우울은 그 기억의 방식을 바꾼다. 밝고 환한 기억이 아니라, 누군가의 뒷모습이나, 끝내 전하지 못한 인사, 혹은 꿈속에서만 존재했던 얼굴 같은 것들이 중심이 된다. 망각의 가장자리에서 건져 올린 감정들은 더 이상 생생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 희미함 때문에 더욱 정직해진다. 우울은 정직한 문장을 강요한다. 과장하거나 왜곡하지 못하도록 감각을 고르게 펼친다. 그러니 우울은 어떤 의미에서는 글쓰기의 리트머스지다. 지금 쓰고 있는 문장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판단해 주는 가장 민감한 도구다.
우울 속에서 쓰인 글은 결코 빠르지 않다. 그 문장들은 불안정한 계단처럼 이어진다. 한 단어를 쓰고 나면 두 단어를 지우고, 세 문장을 쓰고 나면 네 문단을 버린다. 그러나 그 느림은 또 다른 진실을 보여준다. 속도와는 다른 종류의 생명성. 우울은 모든 것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말하고 싶은 것과 말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거리를 줄이기 위해 끊임없이 침묵과 싸우게 한다. 그래서 어떤 문장은 우울을 견딘 문장이고, 어떤 문장은 그것을 도려낸 자국이다.
글을 쓰는 이의 마음속에는 두 개의 목소리가 있다. 하나는 계속 써야 한다고 말하고, 다른 하나는 아무것도 쓰지 말라고 속삭인다. 우울은 후자의 목소리를 증폭시킨다. 그러나 글쓰기는 종종 그 균형에서 시작된다. 끝내 쓰게 되는 문장은 그 두 목소리의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잔류물이다. 감정의 최전선에서 밀려온 잉크 자국.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 그 문장을 읽는다. 타인의 우울과 자신의 우울이 어딘가에서 겹쳐질 때, 그 문장은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된다. 글쓰기는 결국 가장 사적인 것을 가장 보편적으로 만드는 일이다. 우울이 만든 문장은, 그렇게 해서 하나의 통로가 된다. 어두운 방 안에서도 누군가에게로 가닿을 수 있는 유일한 빛줄기처럼.
그 빛은 크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울 속에서 쓰인 문장은, 시간이 지나도 발화 온도를 잃지 않는다. 마치 오래된 편지 속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손 떨림처럼. 글을 쓰는 이의 우울은 그러므로, 언젠가 읽는 이의 위안이 된다. 그것이 글을 쓰는 이유일 수도 있다. 어쩌면 유일한 이유.
창문을 닫은 채 오래 묵혀둔 방처럼, 우울은 한 문장 안에 숨죽인 채 머문다. 그것은 결코 밖으로 터지지 않으며, 다만 문장의 표면에 얇게 낀 먼지처럼 존재를 남긴다. 타이핑 속도가 느려지고, 글자의 간격이 점점 넓어지는 동안, 그 조용한 공기 속에 마음은 점점 눌린다. 말끝마다 스며든 사소한 침묵들이 종이 위에 얼룩처럼 번지고, 단어 하나를 선택하는 데 몇 시간씩 머뭇거리게 된다. 하지만 그 느림이야말로 어떤 진실의 무게를 담보하는 유일한 속도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은 문장의 틈으로 흘러나오지 못하고, 오직 오래 눌러쓴 손끝 아래에서만 결을 드러낸다. 그렇게 태어난 문장은 대체로 간결하지 않다. 그것은 삐걱이고, 한쪽이 기울고, 감정의 균형을 잃은 채 흔들리지만, 바로 그 불안정함이 독자의 마음을 건드린다. 마치 감정을 숨긴 사람의 눈꺼풀 떨림처럼, 아주 미세한 진동으로. 모든 게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남는 건 바로 그 떨림이다. 우울을 견디며 써 내려간 문장은 쉽게 휘발되지 않는다. 그것은 읽는 이의 밤에 도달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등을 토닥인다.
의미는 끝내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고, 문장은 어딘가 모르게 비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공백은 끝까지 남아 있으려는 의지로 빚어진다. 바로 그 의지가, 언어의 가장자리에서 끝내 문장을 잉태하는 힘이 된다. 그러니 우울이 글을 망치는 게 아니라, 글의 심지를 깊게 잠그는 것이다. 누구도 말하지 않는 고요 속에서 단 하나의 문장이 완성된다. 다 타버린 성냥 끝에서 마지막으로 피어오르는.
미약하지만 명확한 불빛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