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올 길이 막막한.
휴대폰이 울리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불길했다. 세상과의 연결이 끊긴 듯한 정적은 이상하게 안심시키는 동시에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치 연락을 기다리는 유기견처럼, 아무도 부르지 않는데도 줄곧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때 문득, ‘힐링’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광고 속 어느 온천의 스팀 같은 말. 트렌디한 카페의 배경음악처럼 감미롭고 가볍게 들리지만, 실은 그보다 더 깊은 무언가.
힐링.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일상에 들러붙은 말. 마치 속살을 드러내는 티셔츠처럼. SNS 피드엔 “요즘은 힐링이 필요해요”라는 문장이 넘쳐났다. 여행, 식사, 낮잠. 어떤 행위든 힐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어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그것을 통제하려는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했다. 힐링이라는 과정을 거친 후에도 다시 어둠으로 돌아오곤 했다.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힐링은 늘 도피처럼 느껴졌다. 그곳엔 출구가 없었고, 언제나 입구만 있었다. 편도 티켓처럼, 떠나는 순간은 확실하고 벅찼지만, 돌아오는 길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처음으로 힐링을 떠올린 건 이십 대 초반, 모든 것이 견고하게 무너지던 시기였다. 매일 저녁이면 복잡한 기차역에 혼자 서 있는 꿈을 꿨다. “편도입니까, 왕복입니까?”라는 매표원의 질문 앞에서 망설이다가 결국 “편도요”라고 대답했다.
기차를 타고 동해안의 조용한 도시로 향했다. 이름도 잊은 작은 마을. 회색 모래사장과 굳은 염전 냄새. 무언가를 치유하려는 마음보다는 그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욕망이 앞섰다. 그곳엔 ‘힐링’이라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이 없다는 것 자체가 위로가 되는 시간. 어쩌면 힐링이란 ‘말을 멈추는 기술’ 인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언제나 복귀였다. 고요한 바다를 뒤로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현실은 여전히 무거웠다. 할 일은 산더미 같았고, 늪은 다시 시작되었다. 힐링은 마치 꿈속의 도피처 같았다. 떠날 땐 모든 것이 낭만처럼 보이지만, 돌아올 땐 더 깊은 허무가 기다리는.
시간이 흐르며 점차 알게 되었다. 힐링은 회복이 아니라 격리라는 것을. 감정과 관계, 사회로부터 자신을 잠시 분리해 두는 일. 일상의 파편들을 뒤로 미뤄두는 행위. 고장 난 기계를 끄고 리셋 버튼을 누르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리셋 이후에도 결국 동일한 프로그램이 구동된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한번 힐링하고 와야겠다”는 말에는 ‘다녀오면 괜찮아질 거야’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일지도 모른다. 힐링은 여행이 아니다. 오히려 실종에 가깝다. 자발적인 실종. 무언가로부터 자신을 숨기는 일. 그리고 실종자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힐링은 말하자면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다른 인생이다. 누군가가 해주는 아침 식사, 파도 소리로 잠드는 밤, 낯선 도시의 언어가 배경음악처럼 흘러가는 하루. 그러나 그 인생은 견본품일 뿐이다. 마트 시식 코너에서 한입 베어 물고 버리는 음식처럼, 입안에 감도는 맛은 달콤하지만, 그것으로 배부를 수는 없다.
이제는 힐링을 애써 쫓지 않는다. 오히려 ‘견디는 감각’을 신뢰한다. 아주 작고 미세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감각. 매일 아침 정수기 물이 떨어지는 소리, 빨래에서 피어나는 햇살 냄새, 늦게라도 도착한 답장. 그 미세한 감각들이 쌓이면, 어느 순간 조금 나아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은 힐링을 외부에서 찾지만, 그것이 실은 내부의 조율임을 이제는 안다. 균형은 외부로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내면의 조율자, 손끝에서 스스로 맞추는 일이다. 그 조율은 결코 휴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통과 반복, 긴장과 피로의 틈에서 오히려 더 명확히 맞춰진다.
“그래서, 당신에게 힐링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 앞에서는 대답 대신 창밖을 본다. 세상은 여전히 복잡하고 어지럽지만, 그 복잡함 속에서 나름의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선택한 방식의 힐링. 편도여도 좋다. 돌아올 길이 막막해도 괜찮다. 인생이란, 한 번쯤은 돌아오지 않을 용기를 필요로 하는 여행이니까.
끝없이 걸어가는 자만이 그 길을 여행이라 부를 수 있다. 힐링은 종착역이 아니다. 오히려 낯선 플랫폼에서 다시 생각을 정리하는 짧은 정차일 뿐이다. 너무 오래 머무르면 기차는 떠난다. 언젠가는 다시 발을 디뎌야 한다. 그 한 발이 이전보다 단단해졌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힐링은 구원이 아니다. 다만, 스스로를 구원할 준비를 하게 한다.
결국 진짜 힐링은 누가 대신 끊어주는 편도 티켓이 아니다. 어딘가로 떠나는 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남는 용기다. 손에 쥐어진 여백과 불안, 고요한 침묵의 사이에 꾹 눌러쓴 한 문장 같은 것. 그 문장을 외우며 하루를 견디고, 고요 속에서 조금씩 자신을 읽는다. 힐링은 몸을 뉘는 바닷가 리조트도, 누군가 준비해 준 말랑한 치유의 말도 아니다. 새벽 세 시, 아무도 읽지 않은 문장 앞에서 홀로 눈을 떴을 때, 문득 스스로를 마주 보는 일.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어떤 고요는 멈춤이 아니고, 어떤 침묵은 포기가 아니다. 잠시 망가져야 비로소 무엇이 부서졌는지 알게 된다. 힐링은 고장 난 곳을 덮는 붕대가 아니라, 그 상처에 조용히 손을 얹고 상처의 열기를 느끼는 행위다. “이건 내가 감당해야 할 내 삶의 무게구나”라고 낮게 중얼거리며, 다시 들춰보는 고통의 기록. 그리고 그 기록을 들고 다시 걸어가는 것. 힐링은 삶을 더 이상 회피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치유란 돌아오지 않는 편도 위에서 완성된다. 더 이상 돌아갈 필요가 없을 때, 돌아갈 곳이 아득하게 멀어졌을 때 비로소 생겨난다. 힐링은 ‘이전의 나’로 복귀하는 일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나'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 다름은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모양으로 남는다. 그러나 바로 그 틈, 그 불완전성의 틈 속으로 빛이 스며든다.
힐링은 고요의 다른 말이 아니라, 고요를 감내하는 기술이다. 시간의 입자들이 가라앉은 감정의 바닥에서 조용히 다음 생을 준비한다. 언젠가 도착할지도 모를 이름. 낯선 역의 풍경처럼. 누구도 맞이해주지 않는 곳에서,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의 유일한 환영이 되는 그 순간. 힐링은 그제야, 비로소.
아무 말 없이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