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허기를 다루는 방식에 대하여.
불은 언제나 두 직업의 출발점이었다. 요리사는 불 앞에서 재료를 다루고, 글쟁이는 불처럼 번져가는 언어의 열기를 다룬다. 불이 없다면 요리는 생존을 위한 건조한 섭취에 불과할 것이고, 불이 없다면 글쓰기는 차갑게 굳은 기록의 목록에 불과할 것이다. 불은 재료를 변화시키고, 동시에 의미를 변화시킨다.
고기를 익히는 행위와 문장을 발효시키는 행위는 서로 닮아 있다. 요리사는 손끝으로 칼날의 각도를 조절하고, 글쟁이는 문장의 호흡을 조율한다. 칼끝에서 잘려나가는 파의 흰 줄기와 마침표 뒤에 이어지는 여백은 모두 정교한 침묵을 만들어낸다.
식탁 위에 놓인 음식은 단순한 조리의 산물이 아니다. 재료가 어디서 왔는지, 그것이 어떤 계절에 수확되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보관되었는지가 모두 포함된 결과다. 글 역시 그렇다. 단어 하나는 언제 처음 배우게 되었는지, 어떤 문맥에서 마음에 남았는지, 그 단어를 사용할 때 어떤 기억이 끌려 나오는지 그 모든 배경이 단어의 무게를 결정한다. 신선한 재료가 깊은 맛을 내듯, 오래 묵은 단어가 문장에 무게를 싣는다.
요리사는 혀의 감각을 믿는다. 글쟁이는 눈의 감각을 믿는다. 그러나 두 감각은 결국 서로를 닮아 있다. 혀는 미묘한 차이를 감지하고, 눈은 사소한 뉘앙스를 포착한다. 미세한 간의 조절과 단어의 배열은 같은 종류의 직업적 강박에서 비롯된다. 어떤 이는 소금을 두 번 넣었다는 이유로 요리를 다시 시작하고, 어떤 이는 한 문장을 열 번 고친 뒤에야 안도한다.
식사라는 행위는 곧바로 몸으로 흡수되지만, 읽기라는 행위는 천천히 기억에 침투한다. 음식은 먹는 순간 사라지지만, 글은 읽고 나서도 머릿속에서 해체와 재구성을 반복한다. 그러나 둘 다 흔적을 남긴다. 좋은 음식은 몸의 기억으로 남아 다시 떠오르고, 좋은 문장은 시간의 깊은 곳에서 불쑥 되살아난다.
요리사가 주방에서 재료를 손질하는 순간과 글쟁이가 책상 앞에서 원고를 다듬는 순간은 이상하게도 비슷하다. 둘 다 외부의 소음을 차단한 채, 손과 눈, 그리고 마음속의 리듬에 집중한다. 칼날이 도마를 두드리는 일정한 리듬과 키보드 위에 떨어지는 손가락의 리듬은 결국 같은 박자다. 리듬이 깨지면 맛이 달라지고, 문장이 삐걱거린다.
요리사의 세계는 반드시 타인의 입을 통과해야 한다. 아무리 완벽하게 조리했다고 해도, 상대가 맛있다고 느끼지 않으면 그것은 실패한 요리가 된다. 글쟁이의 세계도 다르지 않다. 아무리 세련된 수사를 동원하고 깊은 주제를 담아도, 독자가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글은 메마른 문장에 불과하다. 두 직업 모두 타인의 감각에 자신을 의탁해야 한다. 그래서 두 세계는 언제나 불안하다.
불안은 때로 창조의 원동력이 된다. 요리사는 손님의 반응을 가늠하며 간을 조절하고, 글쟁이는 독자의 가능성을 상상하며 어휘를 고른다. 하지만 불안은 또한 독을 품고 있다. 요리사가 손님의 입맛에 지나치게 맞추면 자기만의 요리를 잃고, 글쟁이가 독자의 기대를 과도하게 신경 쓰면 글은 표준화된 제품으로 전락한다. 두 직업 모두 균형을 찾아야 한다. 자신만의 맛과 문장을 지키면서도, 타인의 혀와 눈에 닿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한다.
식재료는 유통기한이 존재한다.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부패한다. 단어 역시 그렇다. 시대에 따라 낡아버린 단어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어떤 단어는 한때 혁명적이었으나 지금은 교과서 속에서만 박제되어 있다. 요리사는 시장에서 신선한 재료를 찾듯, 글쟁이는 시대 속에서 아직 살아있는 단어를 길어 올린다.
역설적으로, 오래된 것이 새로움을 낳기도 한다. 발효음식은 썩음과 보존 사이의 긴장 위에서 탄생한다. 글 역시 잊힌 문장이나 고어가 다시 소환될 때 새로운 빛을 발한다. 발효는 곧 시간이 남긴 흔적의 미학이다. 요리사와 글쟁이 모두 발효의 미학을 이해한다. 오래 묵힌 장맛이나 세월이 밝힌 문체가 내는 깊이는 신선함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차원이다.
두 직업은 실패에 대해 특별히 예민하다. 요리사의 실패는 즉각적이다. 손님은 젓가락을 멈추고, 음식은 남겨진다. 글쟁이의 실패는 지연된다. 독자는 책을 덮고, 문장은 기억에서 지워진다. 실패는 언제나 피할 수 없는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그러나 실패는 또 다른 가능성의 공간이기도 하다. 실패한 요리에서 새로운 레시피가 태어나듯, 실패한 문장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싹튼다.
주방은 뜨겁고, 원고지는 차갑다. 그러나 뜨거움과 차가움은 교차한다. 주방의 열기 속에서도 요리사는 차갑게 계산한다. 불의 세기, 소금의 양, 손님의 순서. 원고의 차가운 활자 속에서도 글쟁이는 불타는 욕망을 감춘다. 누군가는 그것을 창작의 열기라고 부른다. 결국 두 직업은 서로의 반대 속에서 같은 목표를 향한다. 뜨거운 것을 식히고, 차가운 것을 달구며, 감각의 균형을 맞추는 일.
한 접시의 음식은 결국 시간의 응축이다. 재료가 자라난 계절, 요리사가 보낸 준비의 시간, 불 앞에서의 몇 분. 한 편의 글도 마찬가지다. 단어를 습득한 어린 시절, 사유를 축적한 세월, 문장으로 옮겨 적은 몇 시간. 두 결과물 모두 눈앞에 놓이는 순간만을 위해 긴 시간을 통과한다. 그래서 완성된 음식과 글은 언제나 순간의 찬란함과 시간을 견뎌낸 무게를 동시에 지닌다.
사람들은 좋은 음식을 먹을 때, 단순히 배를 채운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위안이고, 기쁨이고, 때로는 기억의 환기다. 좋은 글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구멍을 메우거나 오래된 기억을 불러오거나 새로운 시선을 열어준다. 음식과 글은 결국 인간의 결핍에서 출발한다. 허기를 달래거나, 의미를 찾거나.
결핍을 채우는 방식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한 끼의 식사는 다음 끼니의 허기를 막아주지 못하고, 한 편의 글은 다음 질문의 갈증을 막지 못한다. 그래서 요리사는 매일 주방에 들어서고, 글쟁이는 매일 원고를 마주한다. 끝없는 반복. 그러나 그 반복 속에서만 새로운 것이 태어난다.
결국 요리사와 글쟁이는 같은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탐험한다. 둘 다 불을 다루고, 감각을 믿고, 시간을 응축한다. 둘 다 실패와 불안을 안고 살아가며, 타인의 감각에 자신을 의탁한다. 둘 다 결핍에서 출발하여, 순간의 충만을 만들어낸다.
음식은 먹는 이를 바꾸고, 글은 읽는 이를 바꾼다. 요리사의 손끝과 글쟁이의 펜 끝은 서로 닮은 궤적을 그린다. 두 직업이 다루는 것은 결국 같은 것, 인간의 삶을 잠시라도 더 따뜻하게 혹은 더 깊게 만드는 행위다. 둘은 불을 다루며 서로를 닮아간다. 요리와 글쓰기는 인간이라는.
동일한 허기를 향한 두 방식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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