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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Jan 27. 2020

아빠! 설날에 외할머니 성묘갑니다!

나의 호롱불, 나의 할머니



설날 아침, 늘 그랬듯 차례를 마치고 성묘 준비를 했다. 엄마에게 할머니 산소도 다녀올 테니 따로 제사음식 좀 챙겨달라 부탁하여 들고 나왔다. 성묘를 마치고서 아빠를 인근 정류장에 내려 드렸다.

아빠. 외할머니 산소에 다녀올게요.


다시 차를 몰었다. 15킬로도 안 되는 지척 거리인데도 성묘객이 어찌나 많은지 소요시간 50분이 찍혔다. 아내는 피곤할 텐데 갈 수 있겠냐 물었다. 나는 가겠다고 했다. 아내는 아들을 품에 안고서  '오늘은 외증조할머니가 잠들어 계신 곳에 가는 거야~ 첫인사 잘 드리자!' 차근차근 설명을 해줬다.

할머니 무덤 앞에 다다르고 보니 막상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조금은 늙어버린 내 모습과, 뉴 페이스 종손의 주니어와 아내와의 동반, 이승에서의 변화만 있을 뿐이다.


할머니 앞에 서서 아들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요 녀석은 할머니는 안 보고 주변에 눈이 팔려 정신이 없다.

할머니 우리 서원이에요. 할머니. 제가 왔습니다.


막상 절을 드리려니 무릎을 꿇고 잔디만 움켜쥐게 된다. 복받친 마음이 터져올라 일어나지 못하고 한참을 울었다. 울고 또 울었다. 아내가 깜짝 놀라 마흔 먹고 새삼스레 왜 그러냐며 그만 울라고 다독였다. 사실 나는 울기 위해 온 것이었다.

나에게 할머니는 오직 두 분이었다. 익선동 할머니(외고모 할머니), 그리고 외할머니. 친할머니는 애들을 별로 안 좋아하셔서 가까이 갈 일도 별로 없어 내 기억에 남은 바가 없다. 나는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김씨 집안의 품에서 보냈다. 사람은 손을 탄 사람에게 마음을 두는 법이다.

전날 밤, 티비에서 북한 소년의 탈북기를 봤다. 한국으로 떠난 부모 찾아가겠다고 외할머니께 말씀도 안 드리고 산 넘고 물 건너 중국으로 왔다고 했다. 다들 애가 너무 딱하다고 했지만 나는 하루아침에 손주를 잃은 할머니 마음은 어떨까 거기에 더 신경이 갔다.


할머니는 지금도 손주를 찾고 계실 텐데.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하시며 마지막 남은 생을 고통 속에 보내실 텐데.


티비에서는 온통 그 아이와 먼저 탈북한 부모의 상봉 이야기에만 몰두했다. 그 뒤에 찾아올 한스러움에 대해 걱정하고 있을까. 부모를 두고 온 자식과, 그 부모의 부모를 버려둔 채 떠나 온 자식의 자식이 평생 지고 갈 고통의 모래바람이 곧 폭풍처럼 몰려올 텐데.


요즘 양성평등이라 해서 ‘외할머니’라는 말도 친족호칭 문제로 엮여 이래저래 한 것 같다만, 돌이켜보면 나는 정작 외할머니 앞에서 ‘외할머니’라고 불러본 적도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냥 할머니.  부르기만 해도 가슴이 따듯해지는 우리 할머니.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만 해도 나에게 세상은 익선동과 그 밖으로 구분 지어졌다. 그밖에는 아빠 회사, 할머니 댁 이렇게 두 개뿐이었다.

엄마는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할머니 댁 가는 길을 아주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3호선을 타고 구파발 역에 가서 55번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를 타고 가다 ‘두테비역’에서 내린다. 버스 타서 지나쳐도 반대편에서 다시 타면 되니 당황해하지 말 것, 도착해서는 바로 집으로 전화할 것.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부터는 방학 때면 혼자서도 쉽게 할머니 댁을 찾아갔다. 그곳엔 할머니가 차려주는 맛있는 대청마루 밥상이 있고, 골방에서 컴퓨터 게임을 알려주는 큰 형도 있었고, 고목나무 사슴벌레를 잡아주는 작은형도 있었고, 읍내에서 갓 사온 각종 최신 만화책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보는 동갑내기 사촌도 있었다. 심심할 틈이 없었다.

어릴 적 밤늦게 오줌이 마려우면 나는 형들 자는 틈새를 까치발로 살금살금 걸어 나와 할머니를 깨웠다. “할머니 오줌 마려워요” 하면 할머니는 마루에 걸려있는 플래시 등을 켜고 나를 데리고 대문 밖 변소까지 길을 터 주셨다. 그리고는 내가 볼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밤바람 춥다시며 나를 포옥 감싸 안고 안채로 들어오셔서는 얼른 이불을 덮어주셨다. 나는 창가 위에 주렁주렁 걸린 메주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잠이 들어버렸다.

버스가 40~50분 간격으로 있었던 것 같다. 집에 돌아갈 즈음이면, 할머니 손이 분주해진다. 내가 좋아하는 절편과 신김치, 밑반찬, 참기름 이것저것 바리바리 비닐봉지에 몇 번이고 싸서 들고 가기 편하게 보자기에 담아 주셨다.

시멘트로 만든 작고 낡은 역 안 의자에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있으면 주변의 강아지풀이 살랑살랑 바람에 흔들린다. “이거 엄마 갖다 줘라” 할머니가 주머니에서 쌈짓돈을 꺼내어 내 손에 쥐어주셨다. “고맙습니다” 하면 또 할머니는 다른 주머니에서 500원짜리 뭉터기를 꺼내어 “이건 갈 때 뭐 사 먹어.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갖고 가.” 하고 내 주머니에 슬그머니 동전 뭉터기를 밀어 넣으셨다.


우리 집 가계경제가 파탄이 나고 엄마아빠가 나를 돌볼 여유가 없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할머니가 내 곁을 지켜주셨다. 할머니가 오늘은 뭘 먹고 싶냐 물으면 나는 된장찌개 아니면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 했다. 할머니가 끓어주시던 그 찌개가 너무 맛있어 밥을 두 그릇씩 먹었다. 질리지 않느냐, 고기반찬 해줄까 물으면 나는 이 찌개가 제일 맛있다고 했다. 엄마가 끓여주는 찌개와는 또 다른 무언가의 매력이 있었다. 먹어 본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맛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90년대 초반, 북한의 '서울 불바다' 언급이 있고 나서 서울 전체가 생필품 사재기로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그때 할머니도 라면을 몇 박스씩 사서 집 한편에 두고 간간히 라면을 끓여주셨다. 라면 속에는 아무것도 넣으시지 않았다.

전쟁이 나면 물 붓고 라면 먹는 것 밖에 없어. 이 맛도 알아둬야지.


그땐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갔다. 한참이 지나 돌이켜보니 전쟁 통에 남편을 잃으시고 자식 둘을 챙겨 피난의 행렬에 끼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셨던 그 시절의 할머니가 세월에 들어왔다. 살아야 한다는 그 맛.


내 나이 스물. 할머니가 속이 불편하시다며 병원에 가셨을 때 의사는 자식들을 불렀다.


위암이다. 상태가 너무 좋지 않다.

 

어느 누구도 할머니에게 위암이라고 이야기 꺼내지 못했다. 다들 갈비뼈가 부러졌다고, 치료가 꽤 오래 걸릴 것 같다고만 했다. 학생이었던 나는 할머니 병상에 붙어 함께 잠을 잤다.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해지셨다. 얼굴은 점점 붓고 더는 일어나지 못하셨다. 그렇게 반년을 넘기시지 못하고 이듬해 정초, 눈을 감으셨다.




대전에 내려온 뒤로 타지 생활의 고달픔을 감히 누구에게도 비출 수가 없었다. 회사는 당연지사이거니와, 부모님에게 걱정을 드려서는 말이 되지 않고, 아내와 자식에게 그 힘든 내색을 토로하기에도 맞지 않았다. 그저 술로 그날그날의 저문 마음의 밤을 지우기에 바빴다.


손주 위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고 온 몸을 사르고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말고는 울 곳이 없었다. 나는 이제 곧 다가올 마흔이 아니라 네 살 먹은 어린아이로 돌아가 그동안에 살며 힘들었던 모든 사연을 말할 것도 없이 그냥 눈물로 털었다.

아내는 평소에 울지도 않는 사람이 왜 그렇게 대성통곡을 하냐고. 글쎄 나도 모르겠다. 애를 낳고 보니 내가 애가 된 것 같다고 했다. 할머니를 만나러 가던, 그리고 용돈 꾹 찔러주시 바래다주시던 그 정류장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엔 혼자 와야겠다 생각했다. 괜한 걱정거리를 가족에게 안겨주는 건가 싶었다.



이번 설에 올라가 내 방 한편에 있던 할머니 유품을 챙겨 왔다. 호롱이다. 컴컴한 밤 내 손을 잡고 빛으로 길을 터 주신 우리 할머니 손길이 묻어있다. 할머니가 보고 싶을 땐 이제 이 호롱불을 켜 두면 된다.


할머니. 또 올게요. 또 와서 좀 쉬다 갈게요.
할머니.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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