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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Sep 30. 2020

시댁에 못 간다고 '차례상' 차리는 아내

명절음식이 체질



"이번 추석은 안 지낸다"

서울집서 연락을 받고 오케이 속으로 외쳤다. 하필 추석 당일에 당직이 걸려 날짜를 바꿔줄 사람도 딱히 없거니와, 무엇보다 둘째 가진 아내와 첫째를 데리고 험난한 코로나 19 위험지대를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처럼 잔잔한 추석이 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아내는 어제부터 심란한 표정이다. 왜 그러냐 물으니 그래도 명절인데 가봐야 하지 않겠냐며 이를 어쩌지 하고 노심초사하고 있다. 아이고 여보 남들은 시댁 안 가면 박수를 치고 춤을 추며 좋아할 텐데 그 무슨 서울집 걱정이오 하니 마음에 걸리는 건 어쩔 수 없다며 또 한 마디 보탠다.


서울집 녹두전 먹고 싶은데... 전도 못 먹고...


나참 헛웃음이 절로 나와 그러면 광주집을 가자 했더니 추석 끝나고 가는 것도 별로인 것 같다며 고개를 젓는다. 자꾸 쩝쩝 입맛을 다시길래 그냥 있는 거 먹자 뭐하면 사 먹으면 되지 하고 아내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사실 나도 조금 어색한 건 마찬가지다. 늘 명절이면 서울집 내 방에 들어가 사대봉사 지방을 쓰던 습관이 들어 아내에게 '나라도 새벽에 혼자 모실까' 하니 아내가 어머니가 절대 쓰지 말라고 지방 태워야 하니까 쟤 하지 못하게 하라고 미리 단도리를 쳤단다.


아침 일찍 일어나 콩나물국밥 든든히 먹고, 노곤한 피로감에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아내가 아들 데리고 나갔다 온단다. 어디 가냐 물으니 차 기름 넣고 자동세차 한단다. 알았다 하고 깊은 잠에 빠졌다.


한 참 늘어지게 자고 있으니 아내가 흔들어 깨운다. 지금 몇 시냐며 애 데리고 놀이터 가라고 난리다. 어 벌써 12시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물으니 장도 좀 보고 왔단다. 누워서 버티고 있으니 아들 녀석이  "꼬끼오~ 햇님이 방긋 솟아올라왔어요! 아빠 놀이터 가서 씽씽이 타요!" 노래를 부르길래 주섬주섬 옷 걸치고 가자가자 가보자 하고 아파트 놀이터 1, 2, 3, 4를 다 돌았다.

놀이터 4에 이르자 벌써 한 시간 하고 반이 흘러 점심 먹을 시간이 지나버렸다. 아내에게 전화를 거니 밥 거의 다 했다고 들어오란다. 대신 놀라지 말라고 한다. 뭐를 놀라는데 물어도 대답은 않고 그저 웃기만 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어 뭐지 이 익숙한 기름 냄새는?


현관문을 여니 서프라이즈! 아내가 환하게 반긴다. 크엇. 주방이 온통 전 세상이다. 녹두전, 육전, 꼬치전에 숙주나물이고 제사상에 들어가는 음식들은 줄줄이 차려 한 상 냈다. 이 정도면 귀신이 곡을 하다 전주로 내려올 판이다. 이게 다 뭐 한 거야 물으니 아내 왈, 아니 그래도 뭐라도 차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며, 전을 좀 먹어야 명절 보낸 느낌이 날 것 같단다. 엄청나게 장을 봐 온 거다.


내가 전 냄새 싫어하는 건 알아서 환기 싹 시켜놓고 냉면 하나 시원하게 말아 내 앞에 내준다. 배도 이제 불룩 나와서는 이걸 다 하고 앉아 있었으니 참 잘했다고 해야 하나 싶으면서도 음식 맛이 참 좋고 정성이 그득하여 딱히 할 말이 없다. 박씨문중 종가의 딸이 맞다. 여장부다.


우리는 만나고서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결혼을 결심했다. 이유야 많겠지만 무엇보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까닭이다. 양가에서 오케이를 받아낸 것도 그 점이 크게 작용했다. 아내가 광주에 내려가 결혼 의사를 밝히니 부모님 말씀이 "사람이 어울려 지낼 줄 아느냐" 고 물으셨다 한다. 남자 친구가 종갓집 장손이라 하니 그러면 됐다고 거기서 도장은 찍혔다. 엄마는 사람이 그릇이 크고 명절 음식을 기가 막히게 한다며 그때부터 완전히 며느리 편이 되었다.


수십 년 간 제사상 모시는 데 진절머리가 난 판국인데. 평소에 전이라면 지긋지긋 손에 대지도 않았을 텐데. 소담한 사기그릇에 가지런히 전부침을 내주니 오늘은 참 고급진 음식이구나 싶었다. 서울의 녹두전과 광주의 육전이 한 자리에 만나다니 그것도 참 재미있구나 싶었다.


며칠 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양동근이 아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쓰레기더미에서 발견되었을 거란 말을 했다. 어?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네하며 웃었는데 참.

종갓집 딸과 종갓집 아들이 만나 살면 가끔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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