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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함이 강함되는

소아마비 조앤언니

by mindy

"소아마비"는 조앤언니를 따라다니는 불운한 꼬리표였다. 한국에서는 1950년대 태어난 아이에게 많이 발생한 병이라고 들었다. 그당시에 바이러스가 퍼졌을 것이다. 소아가 많이 걸렸고 마비(주로 다리)가 일어나서 "소아마비"란 이름을 가졌다는 설명을 읽는다.


혼자서도 다녔던 것 같긴 한데, 곁에 누군가 있을 때 언니의 손을 잡아줬다. 언니의 삶은 독립적이기 쉽지 않았다. 나는 중고등학교 다닐때, 조앤언니와 함께 살았었다. 서울 청파동에서 나는 고등학교를, 언니는 신학교를 다녔다. 신학교 옆에는 교회가 있어서 교회갈 때 언니손을 잡았던 것 같다. 나는 느리게 걷는 언니 보조를 맞추며 귀찮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고, 언니를 부끄러워했던 적도 있었다. 그랬던 나를 부끄러워 한다. 일반인 위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몇년전 자매들과 릭 워렌 목사의 "목적이 이끄는 삶" 책 토론을 하면서 언니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평생을 소아마비 안에 갇혀있었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을. 그건 언니가 그 안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었던 것 같다. 타인의 시선뿐 아니라 자신으로부터도 말이다.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말에 우리들이 기뻐하며 대화를 했었다.


이제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않고, 홀로 독립된 생활을 한다. 지팡이를 짚기도 하고, 워커를 밀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런면에서 장애인을 VIP로 대접하는 캐나다라는 나라에 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1990년대 말 우리 (핵)가족은 토론토를 떠나 시골에 와서 살게 되었고, 언니는 앨버타 프레어리 칼리지(Prairie College)를 다녔다. 언니의 졸업식에 엄마를 모시고 온가족이 함께 축하를 해주러 갔다. 언니는 종교음악중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언니말에는 실력이 달려서 성악을 택했다고 했다.


졸업발표는 개인연주회처럼 치러지는데, 한복을 입고, 성가와 한국가곡등을 불렀다. 교수와 학교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엔 한인 학생들도 있어서 함께 저녁식사도 했다. 시험을 몇번씩 보면서 어렵게 졸업했다고 했다. 한국에서 공부한 것까지 학점인정을 받아서 가까스로 졸업했노라는 이야기다.


우리 집 애들이 어렸을 때 조앤 이모와 함께.


어찌 보면 조금 느린편이다. 일반상식이 뒤진다고 보면 되려나? "형광등"처럼 깜빡깜빡하다가 켜지기도 한다. 이런 부분의 예를 든다면, 감기가 걸려서 고생하는 중에 우리집에 왔을때 남편이 감기약을 챙겨줬다. 미미 동생은 언니가 "감기는 걸리면 꼼짝없이 나을 때까지 있는 것으로 알았지, 감기약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라고 말했다면서 기가 막혀했다. 뭐 사실은 감기약은 있으나 앓을 만큼 앓아야 한다는 말도 있는지라, 조앤언니의 "감기약이 없다"는 발언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수도 없지만 말이다.


어떤 면에서는 또 예리해서 어떤 배우가 코를 성형했는지, 이마에 필러를 넣었는지,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찾아내는 재주가 있다. 자연스럽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대단한 반감(?)이 있는 전형적인 사람이다. 본인은 염색도 하지않고, 선크림 한번을 바르지 않는다. 피부미용에 예민한 자매들도 많아서 그런 언니를 가르치기 위해 입이 닿도록 말하지만, 교화(?)가 안된다.


철없을 때는 언니를 부끄러워하기도 했지만, 언니를 많이 좋아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토론토로 왔을때 엄마와 함께 있는 것을 힘들어했다. 집을 정리하고, 엄마는 노인아파트에 살게 되니, 언니가 얹혀살아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런 제안을 했다. 우리가 살던 곳은 가게 이층집이지만, 비어있는 아파트가 있으니, 언니가 그곳으로 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조앤언니의 시골살이가 시작된다.


우리집의 한 아파트에서 살다가 한인교회가 있는 오웬사운드로 옮기게 된다. 이제는 오웬사운드의 토박이처럼 이곳을 좋아하며 살고 있다.


그동안 한인교회의 부침의 역사가 시작된다. 첫번째 목사의 일탈, 그리고 잘못된 교리, 그를 바로잡지 못한 우리들.

두번째 목사가 와서 다시 소생하는가 했지만, 어느날 신년 첫날에 더는 교회는 갈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교회에 나가지 않겠노라고 말했고, 그걸 언니에게 말했더니 잘했다는 것이 아닌가. 언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세번째 목사가 올 때는 교회문을 닫으려고 할 때였다. 이제는 몇명되지도 않는 이곳에 오겠다는 목사가 생겼다는 것이 기적이었다. 그렇게 3년을 기약하고 왔지만, 3년을 못채우고 이번에는 언니가 더이상 교회에 나오지 않겠다고 했다. 언니는 왜 교회가 있어야 하는지 알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언니와 나, 두사람의 성도중에서 나만 남게 된 것이다. 그것이 올해 3월의 일이다. 이번에야 말로 교회문을 닫게 되었는데, 그동안 꽤 많은 일이 일어났다.


줄여서 이야기하자면,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은 노회의 선교목사가 이 교회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분과 매달 한번씩 1박2일 만나면서 그것이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10년전에 떠났던 사람이 돌아왔고, 많이 모일 때는 5명 정도가 묵상모임을 매주일 한다. 친구 문집사가 떠나면서 우리들을 묶어주었고, 공동체의 사랑과 아름다움을 조금씩 경험하고 있다. 주일에 예배는 열리지 못하지만, 서로의 형편에 관심을 기울인다.


임시목사는 이곳은 선교지역의 한곳으로 생각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노회에서 1명의 목사를 보내 지원하면서 교회의 성장을 바랐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 어떤 훌륭한 목사가 온다고 해도 잘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조앤언니는 "나는 못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이번엔 분위기에 쓸려서인지 묵상모임 리더를 맡고있다. 열심히 공부하고, 설명도 잘한다. 어떤 날은 참석자의 입에서 터져나온 봇물같은 이야기를 그냥 듣는 날도 있었다. 진도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말이다.


전도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조앤언니는 지난번 모임에서 그렇게 말했다. 지나간 교회생활에서 누군가의 잘못으로 이리되었다, 라고 책임을 전가했지만 과연 나는 어떠했나 많이 생각한다고 했다. 예루살렘의 남은자들의 죄악 때문에, 옷을 찢고 머리카락을 집어뜯는 에스라같은 지도자가 되지는 못하지만, 그런 에스라의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나아오는 예루살렘 백성중의 한명이 되고싶다고 했다.


조앤언니는 오랫동안 YMCA를 다니면서 수영강습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수영을 할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수영으로 다져져서 그런지, 또래의 나이에 비해 건강해보인다. 자신의 소아마비는 "경한 장애"라는 것을 많이 느낀다고 말한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 지체장애인, 치매노인 등 참으로 많은 아픈 이들을 보면서, 이제는 남을 돕는 삶으로 나아가는 조앤언니가 가까운데 있으니 나는 행운아이다. 엄마와 큰언니가 돌아가시고, 미미 동생이 친정이라고 찾아온 조앤언니의 집, 언제나 연약해보였고, 남들에게서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았던 사람이, 남을 돕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아가게 된다.


막다른 골목에 부딪친 미미 동생에게 캐나다로 오라고 한 것도 조앤언니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미미는 한동안 집을 떠나있어야 할 것 같은데, 한국을 갈까 한다고 언니에게 말했다고 했다. 조앤 언니는 캐나다로 와라, 이곳에 동생도 언니도 사촌도 있는데 이곳에 와서 시간을 보내고 가는 것이 좋지 않냐,고 말했다고 했다. 미미 동생은 우리와 있으면서 몇번의 눈물을 훔쳤다. 이곳에 있는 동안 묵상모임에도 두번이나 참여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우리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아픔을 나눴다.


미미는 조앤언니가 이끄는 묵상모임이 아주 좋았다고 말한다. 자신이 궁금하게 여겼던 예루살렘의 역사를 알기쉽게 설명해주기도 했다고 했다. 진부하지 않은 지도자라고나 할까? 어쩌면 임시목사가 꿈꾸는 오웬사운드 교회의 미래는 이렇게 평신도가 이끄는 그런 교회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며칠전 이런 성경구절을 읽었다.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9장 23-24절)


조앤언니에게는 팬이 많다. 자매들끼리 인기투표를 한다면 조앤언니가 뽑힐 공산이 크다. 그 언니가 뽑힌다면, 누구도 질투도 경쟁도 느끼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녀는 답답하고, 쓸모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는 사람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교회에서 음식을 준비할때, 또다른 일이 있을때 자천타천 열외가 된다.


나는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언니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알게 되었다. 음식을 준비할 때, 조금만 호흡을 느리게 하면 조앤언니가 담당할 일이 있다. 요즘은 과일을 주로 맡는다. 디저트를 가져올 때도 있다. 지난번 언니와의 여행에서 밝혔듯이 여행에서 언니는 많이 못 걷지만, 기다려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언니에게 있다. 걸을 수 있는 사람, 다녀오라고 한다. 그렇게 여행의 동반자로 손색이 없다. 조앤언니가 잘하는 일이 있기에 함께 하는 것이 즐겁다.


평생을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지만, 교회와 목사들, 신앙의 길에는 수많은 변곡점이 있었다. 인생길이 그런 것 같다고 우리들은 공감한다. 교회가 인생의 다가 아니고, 목사도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닐 수 있지만, 하나님과의 그 연결을 놓지 않는다면, 이세상의 길이 살만한 길이 된다는 것을, 언니를 통해서 알게 된다.


어제는 유언 비슷한 것을 내게 했다. 이제 70대에 들어서게 되니, 미리미리 죽음준비를 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것 같다. 본인이 생명보험을 들어놨고, 그 수혜자를 교회로 했다고 했다. 최근의 대화를 통해서 "교회"에 자신의 장례를 맡긴다는 발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내 앞으로 하고, 제2수혜자는 막내동생앞으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자신은 화장하여, 재는 산속에 묻어주면 좋겠다고 했다. 장례예배는 교회에서 하고., 남은 돈이 있다면 공원이나 트레일 코스에 군데군데 있는 벤치들처럼 벤치를 1개에서 2개쯤, 이름을 달아 설치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혹시나 더 남는 돈이 있다면 교회에 헌금하면 좋겠다고. 나는 그러마,라고 대답했다. 내가 먼저 가게 될지 모르지만, 조앤언니보다 조금은 젊으므로, 그리고 가장 가까이 있으므로 그 담당은 내 몫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자식이 없어서 양로원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집에서 죽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한다. 언니가 나보다 더 건강해 보일때 이런 이야기를 들어서, 슬프지 않다. 언니의 삶은 약함이 강함이 되는 그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목소리가 크고, 고집이 센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이 언니의 매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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