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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월 Jan 04. 2024

하나를 부르지

— 자동차에 커피를 넣지 마세요



커피와 기름이 똑같이 까만 물이라고 빈 연료통에 커피를 붓지는 않는다. 그랬다간 고장이 나고 말 것이다.



위가 독을 거부하고 토해내듯이, 같은 까만 물이라고 연료통이 비거나 덜 찼다고

커피를 자동차 연료통에 들이붓지 않듯이

감각정보를 채워야 하는 때, 통합적인 전체세계와 일치[를 경험]해야 하는 때에

분석 대상이 되는 개념과 명확한 지칭을 추구하는 언어, 분절하는 정보를 넣는 것은 해롭다. 기계라면 고장의 원인, 그런데 인체도 그렇다.

몸은 발달시기에 따라 해당 정보를 거부하거나 차단한다. 못 먹는다. 그래서 통합하는 감각정보를 수용하는 시기에, 발달시기상 ‘그러한 사람’인 때에 분석하고 분절-하는 정보가 들어오면 졸립고 잠이 든다. 혹은 딴청을 피우고 저모르게 딴 생각에 빠져든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그림을 보는 것보다 자연을 보고, 그 속에 뛰어들고, 그것들을 만지고 뒤섞고 엉켜야 한다. 그들에게 예술-을-본다는 건 예술-과-분리되는 것이다. 그들은 뛰어들어 자신을 대상-과-주체로 분리하는 대신 뒤엉켜 나-는-너가 되고, 되어서 나-와-너를 껑충 뛰어넘고 예술-을-감각하는 대신에 예술-한다.

이 특수한 시기는 통상 이갈이 전까지 충분히 충족되어야 한다. 그릇을 채우고 비우고 몇 번이든 할 수 있지만, 한 번 빚고 말리고 구운 그릇의 크기와 내용량 형태는 바꿀 수 없듯이 우리가 흔히 ‘아이’라고 부르는 시기의 사람은 필요한 것을 그대로 겪어 자기 몸으로 바꾼다.

이 시기에는 지루하고 심심한 게 좋은 것이다. 심심함은 내 안과 밖이 부조화를 이루어서 발생한다. 나는 분주한데 밖이 느릿느릿하기 때문에 안달이 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안의 분주함에 걸맞게 변화를 일으키고 싶다면 자기가 세계와 함께 뛰놀면 된다. 그러지 않고 전자기기를 사용해서 감각을 충족시키거나, 지식을 접하고 주입해 현혹하면 잠깐은 즐기는 것 같고, 대단해 보일지 모르나 결국 망가진다. 그의 인생의 총 역량이 왜곡된다, 왜소해진다.

어릴 때에는 필요한 것을 수용해야 한다. 떼를 써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이들이 떼를 쓰는 이유는 그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다른 게 합리적이라고? 다른 방법들은 아이보다 양육자나 다른 어른들이 잘 쓴다. 아이는 이길 도리가 없다. 그러면 아이는 제가 가장 잘하고 제가 이기는 길을 가는 것이다.

보통 떼를 쓰고, 그렇게 야단을 벌이면 곤란하기 때문에 어른들이 달래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쥐어 준다. 그래서는 안 된다. 평소에 별일 없는 때에 ‘기분’대로가 아니라 숙고한 ‘뜻’대로 아이와 의사를 교환하여야 한다. 들어줄 것은 들어주고, 맞는 것은 맞다고 하되, 아닌 것은 아닌 대로 두어야 한다. 늘 그래야 한다. 그러면 아이는 이게 안 된다는 걸 안다. 안 된다는 걸 알면 비로소 다른 것을 한다. 잔을 비워야 잔에 새로운 걸 채우는데, 아이들이 자기 방식을 버릴 마음을 먹어야 한다. 안 먹히는 걸 확실하게 경험해야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배우기 시작한다. 궁리하고 시험하고, 계속 시도한다. 그걸 격려하면 된다.


발달상 부딪치는 문제는 대부분 기호(嗜好)가 수용・불수용을 가르면서 발생한다. 수용-불수용 여부를 가르는 것은 기호가 아니라 본래진면목(本來眞面目, Nature, 本性)을 따라야 한다. 본성이라는 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본성이 실제로 무엇이느냐는 오랜 논쟁거리였고,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아주 엄밀한 학적인 면에서 하는 얘기이고, 직관적이고 일상적으로는 상당히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본성이 관찰된다. 아이들은 하나가 되려고 한다. 그것을 통해 무리 생활을 습득하고 적응한다. 아이들의 몸과 마음이 세계를 받아들이게 하려면 세계가 아이들을 받아들이는 상황, 다시 말해 실컷 뛰놀고 마음껏 오감으로 맛보는 경험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걸 다지면서 개념을 갖추는 것이다.


우리는 자꾸 남과 구분하여 나를 찾고자 하지만, 그런 식으로 찾는 나는 텅 비어 있다. 허무하다. 진정한 나를 찾는 방법은 둘로, 둘로 자꾸 나누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를 불러서 하나로 모이어서이다.

우리 뇌를 보자. 뉴런과 뉴런은 각자 독립된 세포이지만 신경전달물질로 ‘하나의 신경망’으로 작동한다. 실은 온몸의 세포가 그러하다.

사람과 사람은 각자 독립한 개인이지만 언어로써 ‘하나의 공동체’로, ‘하나의 의식’으로 탄생하고 생활한다.


먼저는 ‘하나’다.

이 하나의 품이 크고, 너르고, 단단하고, 살아있는 것답게 유연하고 탄력을 갖추게 하는 것. 이게 배움을 위한 일체 행위의 첫머리에 놓인다.


같다는 걸 먼저 배운다. 이게 몸에 확 배게 익혀지면

때가 이르는 대로 차례 차례 열매가 열린다.

쪼개진 속에서 맞갖게 분할한 것을 확인한다. 이걸 억지로, 제 스스로의 힘이 아니게 바깥에서 작용하여 구분짓겠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아이들의 성장은 놀랍기 짝이 없다. 아이들은 단순히 성장한다기보다 진화한다.

물질존재에서 생명으로, 생명에서 인격으로.

그런데 처음에는, 앞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더불어 지낼 수 있도록, 건강할 수 있도록 물질 존재로서 턱 없이 흐르고, 생명으로서 활달하게 어울려 춤춘다. 그러므로 이 상태에 어울리는 연료를 공급해 주자.

안 그러면 엔진은 창조하는 대신 파괴한다. 내파(內破)하고-외파(外破)한다.

진정한 줄탁동시는 아이가 알 속에서 다음 존재로 태어나기 위해 달라 하는 걸 주는 것이다. 지금은 하나를 부르지 않나. 그럼 하나를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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