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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월 Jan 25. 2024

귀납의 한계

— 결국 연역을 거쳐야 한다



귀납의 한계는 결국 연역을 거쳐야 한다는 데 있다.

연역을 거치고서야 다른 것과 연결할 수 있다.

연역으로 바꾸고서야 적용 가능해지는 것이다.


귀납이 사례가 많다 한들 연역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

사례는 ‘부정’하는 데 효과적이다.

부정하고 파괴하는 데는 낱개 한 개로 충분하다.

반증에 강력한 데 비해 귀납은 무엇을 검증해 주지는 않는다.


연역은 다른 연역에 의해서만,

연역들 간의 지지와 연대로 입증하고 유효화한다.

언어의 세계에서

사전 속의 글자들이 사전 속 다른 말들로 자신을 풀이하고

그렇게 돌고 돌아 모든 말들은

외부에 의존해 정의되지 않고

상호 규정한다.


그것이 거짓이면 야합이지만

정신의 고유한 대상으로서 관념은 실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과 거짓을 나눌 수 있고,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 태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태어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창조된 영원. 시작은 있고 끝은 없는 에온(Aeon)이다.


귀납은, 경험을 믿고

경험하지 않은 것, 확인하지 않은 것과 싸운다.

직접 부딪치고 실행하지 않고는 무엇에도 결코 권위를 주지 않는다.

이 불굴의 힘은

귀납으로 하여금 거짓을 부수게 한다.

그러나 부수는 것은 짓는 게 아니다.


연역은, 직관을 믿고

논리에 의존하며,

개별 사항에 의존하지 않고

관계의 그물을 타고 움직인다.

연역과 귀납은 서로 다른 덕을 지니는데

귀납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줄 알고

연역은 새로운 것을, 모르는 채로, 만나기 전에 이미 쓸 줄을 안다.


그래서 귀납은 돌아보고 과거를 재현하는 데서 더 나아가기 위해

연역을 취한다.

연역에 들어간다.

마치 고집 세고 콧대 높은 웃자란 아이, 덜 익은 어른 같다.


연역에 힘입어

귀납은 자신이 취한 새로운 ‘사실’을 퍼뜨리고

그것이 진실한지 실험할 기회를 얻는다.

이 상처를 아문 약이

저 상처를 아물게 할지

엄정하게 확인하지 않은 채로도 다시 ‘믿고’ 혹은 겸손되이, 또는 경계하여

‘가정’하고 쓴다.

귀납은 꾸준히 사례를 모은다.


그러나 개인 또는 집단이

단 한 번 처음 마주친 일에 옳은 답을 내는 길은

연역이다.

그래도 귀납이 가치 있는 건

연역을 밀고 나가는 데 힘을 준다는 것이다.

틀리고 거꾸로 밀려와도 버티고 설 것이다.

그런 제 힘을 느끼고

거짓 겁주기에 넘어가지 않게 뒤를 든든하게 받쳐준다.


귀납은 땅과 같다.

땅은 아름답게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그래도 그래서 그러므로 그런데

땅은 하늘을 우러른다.

하늘이 열리기를 기다리어 바라본다.


귀납은 믿을 수 있는 강한 도구이지만, 첫째가는 도구가 아니다.

첫째가는 도구를 속이고 아닌 것을 맞다고 속일 때

부수는 망치와 같다.


그러나 부수는 자여,

짓는 자에게 꿇어라.

짓는 자가 짓고서야 너는 부술 수 있으니.


아이들은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직관에서 거짓과 군더더기를 떼는 일은 귀납적 훈련으로 할 수 있으나

직관 자체가 커지는 것은  

상상력을 쓰고 또 쓰며서야 일으키는 일이다.


시체를 수집하는 대신

살아서

예상을 벗어나는

숨쉬는 것들을 좇아라.


숲을 걷고 뛰어라.


아이들은 ‘놀면서’ 훌륭해진다.

없는 데서, 공터에서 자란다.

개천인데도 용이 나는 게 아니라

개천이어서, 개천이어야 용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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